작심삼일은 자존심 상해서 쓴 일기

2025년 1월 4일 토요일 날씨 구름

by 김씩씩

점심을 먹고 소화시키며 뒹굴다가 출판사 ‘이야기장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게시글을 보았다. 제12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이야기장수 대상작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출판사 이야기장수와 편집자 이연실 장수님의 행보를 응원하는 팬으로서 올라온 글을 관심 있게 읽었는데, 소개 글만 보고도 내용이 궁금하여 대상작인 브런치북을 찾아 읽어보았다. 이야기장수의 대상작은 차이경 작가님의 <고딩엄빠의 파란만장 인생 분투기>, 1화만 읽어 보아도 작가님의 엄청난 필력이 느껴졌다. 편집자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글 퀄리티가 이렇게 좋을 수 있나? 이렇게 좋아도 되나? 필력도 필력이지만, 제목 그대로 파란만장 인생 분투기답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 덕분에 몰입감이 엄청났다. 앉은자리에서 지금까지 연재된 30화를 몽땅 읽어버렸다.


오늘 하루는 차이경 작가님의 이야기에 폭 빠져서 약간 정신이 몽롱한 기분이었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어, 온갖 파란만장한 일을 겪으며 살아온 여성의 삶에 연민과 동경이 어렸다.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하며 연재가 중단되었는데,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으로 출간되는 날이 너무도 기다려진다.


한편으로, 차이경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는 갑자기 기가 푹 죽었다. 괜히 심통이 나서 오늘은 일기도 쓰기 싫고 일찍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내 새해 다짐이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은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은 일기에 쓸 만한 이벤트도 없고 무슨 얘기를 써야 하나 고민했는데, 고민 중에 깨달았다. 오늘 내 마음에 크게 부딪힌 사건, 그걸 쓰면 된다는 걸.


잘 쓴 글을 만나면 부러운 마음과 동시에 기가 죽는다. 세상에 잘 쓴 글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맨날 하는 생각이니, 이하생략) 아무도 떠밀지 않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려는 찰나에, 오늘 읽은 책인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만난 문장이 오늘의 내게 꼭 필요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지금 여기, 오늘 이곳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 나는 중국에 온 지 6개월 차에 접어든 40대 초반의 기혼 여성. 정부의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일자리를 찾아 중국까지 온 천체 물리학자 남편을 따라 7세, 4세 아들 둘과 함께 정저우에 왔다. 중국어도 할 줄 모르는 채로 기본적인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 와서 열심히 번역기를 돌리며 생활력을 높이기 위해 매일매일 애쓰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일기를 써도 될 것 같았다. 오늘도 일기를 쓰고 싶었다. 찌질해서 부끄럽지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훗날 언젠가 내게도 잘 쓰는 날이 오면 그땐 그랬지 하며 귀여운 웃음을 지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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