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의 어느 날 밤, 남편이 느닷없이 ‘모수’에 가고 싶다고 했다. ‘흑백 요리사’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 ‘모수’에 가보고 싶단 마음은 있었으나 그냥 단순히 거기까지. 그러나 그는 진심이었다. ‘모수 얼만데?’ 디너 가격을 듣고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 형편에 너무 과분한 금액 아니냐고 나중에 부자 되면 가자는 기약 없는 약속으로 덮어보려 했으나, ‘내가 유튜브에서 봤는데..’로 시작한 남편의 설득은 길게 이어졌다.
현재 우리집에서 돈 버는 사람은 남편뿐이지만, 남편은 개인적인 소비를 거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술이나 사 마시는 정도가 그의 유일한 낙이고 유일한 소비이다. 그런 그가 간절히 원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렇게 원한다는데, 돈 버는 사람 소원 들어주는 셈 치고 예약해 보라고 했다. 쉽지 않다는 예약을 네가 성공할 수 있겠냐는 마음도 있었으나, 남편은 보란 듯이 성공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홍콩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예약일로부터 석 달 뒤, 우리는 홍콩에 왔다. 홍콩 모수가 위치한 M+ 건물은 굉장히 한적한 곳에 위치한 모던한 건물이었다. 6시로 예약을 한 덕분에 조용히, 창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준비된 메뉴를 보니 ‘Happy 10th Wedding Anniversary’가 나를 반겼다. 결혼기념일은 아직 석 달이나 남았지만 올해가 10주년인 건 맞으니까, 남편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남편이 유튜브에서 봤다던 한국인 소믈리에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틈나는 대로 테이블에 오셔서 한국어로 메뉴 설명을 더해 주셔서 감사했다. 남편이 와인 페어링을 신청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렇게 하라고,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니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마시고 남기면 본인이 다 마시면 된다고 부득불 우겨 못 이기는 척 끄덕이고 말았다. 속으로는 돈이 아까워 한숨을 푹푹 내쉬었으나, 음식과 함께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돈 아까웠던 마음이 사르르르… 와인 리스트도 가져다주셨는데 메뉴 뒤에 가져다 대면, 매칭이 되는 음식과 함께 볼 수 있는 깨알 디테일. 사소한 것 하나에도 정성이 느껴졌다.
웰컴 드링크와 함께 시작된 본격적인 모수의 시간! 웰컴 드링크는 배향이 나는 맵싸한 술이었는데, 일단 시각적인 면에서부터 합격. 커다란 접시에 놓인 잔이 너무 고와서 보기만 해도 흐뭇했고, 술맛을 모르는 사람이 마셔도 굉장히 오묘한 맛이 나서 신기했다. 웰컴 투 모수!
모수에서 맛본 모든 음식이 맛있었지만, 가장 충격이 컸던 건 스몰 바이트였다. 총 네 가지 스몰 바이트가 나왔고,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모두 훌륭했다.
첫 번째 스몰 바이트인 단새우를 올린 김 컵을 입에 넣는 순간, 문자 그대로 ’바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던 김의 식감과 단새우의 부드러움에 놀랐다. 김 컵 안에는 감자 샐러드가 들어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바삭함이 가능한 걸까. 시작부터 놀라운 맛이었다.
두 번째는 콜라비 타르트. 모수에서 쓰는 콜라비는 내가 아는 콜라비와 다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삭하게 부서지던 얇은 타르트지와 콜라비의 조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웃음이 났다.
세 번째는 생선 큐브가 올라간 타르트. 평소 해산물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모수에서 먹는 해산물은 과연 어떨지 궁금했는데 아니 이게 뭐야? 이 부드러운 생선 식감 뭐야? 바삭한 타르트와 입 안을 데굴데굴 가득 채운 생선 큐브의 부드러움. 비린 맛 하나 없이 부드러워 이건 무슨 생선이냐 여쭈었더니 줄무늬 전갱이라고 하셨다. 줄무늬 전갱이가 맛있는 생선인 걸까, 모수라서 맛있는 걸까.
마지막 스몰 바이트는 모수의 시그니처인 전복 타코. 해산물 쪼렙인 나는 질긴 식감 때문에 전복 역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모수의 전복 타코는 내가 알던 전복이 아니었다. 한 입에 넣을 수 없는 크기라서 반을 깨물었더니 유바의 바삭한 식감과 함께 부드럽게 잘리던 전복. 입안 가득 채운 전복의 맛, 그 식감. 잊을 수가 없네.
귀여운 작은 한 입들을 입에 넣고 남편과 눈이 마주치면 둘 다 동시에, 자동으로 웃음 발사. 평소에는 사용할 일이 없어 잠자고 있던 입 안의 감각들이 모두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이런 맛이, 이런 식감이 가능하구나. 단순히 음식의 맛을 떠나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었다. 너무 황홀한데, 이제 시작이라니. 행복했다.
스몰 바이트를 한 접시씩 비울 때마다 와인을 한 모금씩 곁들이니 그것 역시 좋았다. 술맛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 입 안을 깔끔하게 정리한 뒤 다음 음식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페어링 된 와인이 음식 맛과 함께 나의 기분까지 끌어올려주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참깨로 만든 두부 속에 우니가 들어있다고 해서 약간 걱정도 됐지만 기대도 됐다. 우니라니, 평소 같았으면 남편 주고 나는 쳐다도 안 봤을 텐데 여기선 그럴 수 없지. 기대 반 설렘 반으로 한 입 떠서 입에 넣는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던 웃음의 맛. 여기서는 어떤 재료에 대한 호불호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알레르기만 없으면 오케이. 비린 맛 하나 없이 부드러움과 고소함의 향연 속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함께 페어링 된 준마이 다이긴조 사케를 한 모금 마셔주면, 이곳이 바로 천국.
차돌박이 국에는 따로 페어링 되는 와인은 없지만, 소믈리에 분께서 복분자주를 함께 준비해 주셨다. 한국인들만 느낄 수 있는 차돌박이와 복분자의 소울에 웃음이 났다. 차돌박이 국은 너무나 제대로 한국적인 맛. 차돌박이의 굽기 너무 완벽하고, 이름도 예쁜 잎새 버섯은 향도 너무 예쁘고, 예쁘게 깎아놓았지만 내가 싫어하는 토란까지 너무 맛있었다. 나는 잎 안에서 뭉개지는 식감 때문에 토란을 싫어하는데 이건 뭘까. 왜 뭉개지지 않는 걸까. 이쯤 되니 안성재 셰프님께서 내 입맛에 맞춰 음식을 준비해 주신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스물스물…
옥돔을 한 입 먹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고 있는 이 음식들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촘촘하게 짜여진 계획 하에 순전히 셰프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영리한 결과물이구나. 옥돔의 부드러운 생선살 외의 불순한 것들은 모두 제거된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껏 먹었던 모든 음식이 그랬다. 입 안에 들어갔을 때 불쾌한 감각을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어떤 재료에서 원하는 포인트가 있으면 그것은 최대한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아웃시킬 수 있는 능력, 역시 안성재. 우리나라에 이런 셰프가 있다는 게 갑자기 자랑스러워 동네방네 떠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안성재 보유국! 국뽕이 차올랐다.
귀여운 오징어 순대, 애기 오징어로 만들었다는데 오밀조밀 조합이 너무 앙증맞았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에 속초에서 먹어 본 오징어 순대를 떠올리며 입에 넣었는데, 달라도 너무 다른 맛. 이제껏 어디서도 볼 수 없던 맛. 순대가 이렇게 야들야들 부드러우면 이거 반칙 아니냐고요. 부드러운 순대의 식감을 보완해 주는 한우로 만든 햄과 애기 옥수수까지. 완벽하게 조화로운 요리였다. 남편이 유튜브에서 홍석천이 소스를 핥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마음이 뭔지 충분히 이해가 됐을 정도로 소스까지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드디어, 대망의 도토리 국수! 입에 넣기 전에 향부터가 너무 아찔했다. 사실 나는 트러플도 그닥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글을 쓰다 보니 나 되게 까다로운 사람 같지만, 사실 좀 그렇다. 인정!) 역시나 도토리 국수 앞에서 나의 호불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맛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어디서도 먹어본 적 없는, 정말 맛있는 국수였다. 한식 국수에는 쓰이지 않는 트러플과 버터를 주재료로 사용했음에도, 무엇 때문인지 파스타보다는 국수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도토리 국수. 한 입 먹었을 때는 극강의 맛에 비해 너무 야박한 양이라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다 먹고 보니 딱 알맞은 양이었다. 이미 배가 좀 부르기도 했고, 양껏 한 그릇 먹으면 이렇게 맛있지 않을 느낌? 약간 아쉽다 싶을 때 헤어지는 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마지막 메인 요리는 당연히 맛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먹었고, 당연을 뛰어넘는 맛이 있었다. 맛있게 구워진 스테이크와 차가운 야채들의 조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다니. 마지막까지 신선하고 새롭고 맛있는 감각으로 채워주신 안성재 셰프님, 만세!
음식이 다 끝나고, 디저트 차례가 되자 차와 커피 중 원하는 걸 고를 수 있었다. 남편은 자스민 티, 나는 커피를 골랐다. 모수의 커피잔은 보기에도 예쁘지만,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잔을 입게 가져다 댔을 때 입술에 닿는 그 감각이 너무나 완벽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손에 쥐었을 때의 느낌이 좋으면 그립감이 좋다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뭔가 표현하는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내 언어가 짧아 그 느낌을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게 심히 안타깝다. 아무튼 입술에 닿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컵을 판매하면 그게 얼마든 당장 하나 사 오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났다.
셔벗, 푸딩, 아이스크림, 약과. 디저트도 네 가지가 준비되었다. 상큼하고 부드럽고 꼬숩고, 과하지 않은 단맛. 마무리까지 모두 완벽했다. 남편이 예약할 때 결혼 10주년을 쓰는 덕분에 미숫가루맛 아이스크림에 함께 나온 귀여운 촛불까지. 더없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모수에 다녀온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파인다이닝이 처음이라 충격이 더 큰 것도 같았지만, 이건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엄청난 경험이 틀림없었다. 단순히 ‘맛집에 갔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진짜 진짜 맛있었다’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셰프의 철저한 계획하에, 순전히 셰프의 의도대로 구현된 음식을 경험해 보는, 경험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시각으로 시작해서 후각과 미각까지, 감각 세포를 하나하나 깨워서 즐기는 시간이 실로 황홀했다. 단순히 한 끼 식사로 치면 과분한 금액이지만,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나온 음식들로 내 온몸의 감각을 충만하게 채웠다고 생각하니 충분히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파인다이닝은 엄청난 거장의 공연을 보기 위해 수십 만 원의 티켓값을 지불하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두세 시간의 공연을 위해 사람들은 어렵게 티켓팅을 하고 상당한 티켓 값을 지불한다. 공연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은 단순히 사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공연장을 찾는 이들에게 그것은 지불할 가치가 있는 돈이다. 공연장에서 누리는 무형의 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내가 홍콩 모수에서 경험한 시간 역시 그랬다. 한 끼 식사로는 상상해본 적 없는 큰돈을 지불하고 왔지만,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게다 모수는 한식을 기반으로 한 파인다이닝이었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 나오든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속이 편안했다. 첫 파인다이닝을 모수에서 즐길 수 있어 축복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멋진 공연을 보고 나면 공연의 충격으로 며칠간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모수 역시도 우리에게 오래오래 추억될 시간을 남겨주었다.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준 남편에게 고맙다. 내게 신세계를 열어주었으니, 책임감을 가지고 너무 멀지 않은 날에 다시 또 인도해 주길. 그때는 마지못해 따라가는 게 아니라 흔쾌히, 기꺼운 마음으로 따라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