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자 P’와 ‘파워 J’ 사이에서

by 김씩씩

백수가 제일 바쁘다는 말, 그 말이 딱 맞다. 매일 아침 7시 10분에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서면 나의 촘촘한 하루가 시작된다. 아이들 등교 준비를 도우며 떠들썩했던 마음을 달랠 겸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른다. 털썩. 요즘은 ‘일간 이슬아’를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흐뭇한 얼굴로 메일함을 닫고, 스픽 어플을 켠다. 3월부터 스픽으로 영어 스피킹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직까진 만족도가 꽤 높아서 앞으로도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30분 스피킹 공부를 마치면 아침 식사. 보통 아침은 커피랑 과일, 커피랑 빵 같은 걸로 간단하게 챙겨 먹는 편이다. 그다음은 성경 읽기, 요즘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성경을 조금씩 읽고 있다. 성경을 읽고 나면 종이책도 읽고 시도 읽는다. 종이책은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읽고 싶어서 주중에 혼자 있을 때에만 읽는다. 아껴서, 야금야금. 그리고 3월부터는 시를 읽기 시작했는데, 혼자 있는 시간에 소리 내어 시를 읽는 게 퍽 마음에 들어서 매일 한 장씩 시를 읽고 있다. 대부분 시집이 4장(+해설)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매일 한 장씩 읽으면 일주일에 한 권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욕심 내서 읽다 보니 2주에 3권을 읽었다.


읽는 시간이 끝나면 잠시 휴식. 휴식이라고 해서 멍 때리는 것은 아니고 주로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뜨개를 하거나 뭘 만드는 시간을 갖는다. 뜨개를 조금 하다 보면 배가 고파져서 점심을 대충 차려 먹는다. 점심을 먹고 나면 진하게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오전에 읽다 만 책을 조금 더 읽거나 시집을 한 장 더 읽는다. 시계를 보면 어느덧 2시. 4시 15분까지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데 보통 3시 50분에 나가 택시를 타다가, 이번 주부터는 버스와 도보를 이용하기 시작해서 3시 10분에 집을 나서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책을 조금 더 읽고, 중국어 회화 인강을 들으며 30분 간 중국어 공부하면 끝. 아이들 데리러 갈 시간.


성실한 애플워치가 매 시간 일어날 시간이라고 알려줄 때면 중간중간 자리에서 일어나 빨래도 하고 청소기도 돌리고, 유튜브로 배운 뱃살 빼기 운동도 하고. ‘집에만’ 있는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서 대문자 P인 사람이 파워 J처럼 살고 있다. 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 한 권이라도 더 읽고 싶어서, 어떻게든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망했다. 자발적 망함의 날이다. 내일은 모처럼 외출 계획이 있는 날이라 오늘은 내일의 몫까지 조금 더 빼곡하게 시간을 써야 하는데, 남편이 내게 아이들의 등교를 부탁했다. 원래 등교는 남편 담당이고 하교는 내 담당인데, 지난주에 남편이 좀 힘들어 보여서 내가 몇 번 대신해주었더니 오늘 또!! 갑자기 짜증이 훅 치밀어 올랐다. ‘나 오늘 바쁜 날인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백수가 뱉기에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이라 다시 집어넣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침 운동을 하고 집에 왔더니 9시. 남편이 집에 있길래 책 읽을 흥이 안 나서 애순이를 보며 아침을 먹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났는데도 폭싹 망해버린 아침 루틴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계속 드라마를 보며 뜨개를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셨더니 정신이 또랑또랑 맑아져서 하마터면 책을 읽을 뻔했지만, 오늘은 망하기로 작정한 날. 그냥 쭉 드라마를 보며 뜨개를 하다가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중국에 와서 지내면서 나에게 자꾸 J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아, 몇 달 전에 mbti를 다시 해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P가 슬그머니 J로 바뀌어 있었다. 요즘 내 모습은 흡사 수험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계획이 내 뜻대로 착착착 이루어지지 않으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따르는데 그 기분이 상당히 불쾌하다. 나는 지금 황금 같은 백수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빡세게 사는 걸까. 이런 걸 두고 지팔지꼰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3월이 시작되고 나서, 새 마음으로 내내 성실히 살았으니 오늘 하루쯤은 농땡이 쳐도 괜찮겠지 뭐. 남편한테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잘했다고 칭찬받았다. 원래 이틀 빡세게 살고 수요일은 쉬고 다시 또 이틀 빡세게 사는 거라나 뭐라나. 개똥 같은 소리지만 위안이 되었다.


내일은 중국어 첫 과외가 있는 날. 은영 언니랑 같이 중국 선생님에게 중국어를 배우기로 했는데 과연 어떨지, 좀 설렌다. 10시 수업인데 버스 타고 가려면 8시 50분쯤 집을 나서야 하니까, 아침에 부지런 떨면 스픽 조금 하고 시집 한 장쯤은 읽고 갈 수 있겠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아이고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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