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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Jun 02. 2015

길고 오랜 여행의 실타래를 풀며

서른 살까지는 ‘학습기’지.

내 가족, 내 학교, 내 교회, 내 직장 - 다분히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그 테두리 안에서 뭐든 열심히 흡수하는 데 초점이 있다고 여긴 그 시기를 그와 나는 그렇게 불렀다. 서른이 되면, 그 집중적인 배움으로부터 일단 졸업을 하고 떠나 보자고, 무엇을 꿈꾸어도 좋은 스물서넛 꽃시절의 연인들은 말했었다. 학습기 서른 해를 붙박이로 살았다면,  그동안 우리도 모르게 굳은 몸을 한 번쯤 떼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한 것이 삶이라니, 서른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잘 살펴 그 다음 선택과 집중을 고민해 보자 했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며 꽃시절은 지나갔다. 꽃잎처럼 예쁘지만 꽃잎이라 허약한 약속들은 생활의 바람에 흩날려 의식 저 편으로 사라졌다. 매일 밤 회사에서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주말도 예외가 아니었다. 싱글일 때는 나몰라라 해도 무방했던 양가의 대소사를 결혼한 어른이 되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일 년에 여섯 번인 시댁의 제사가 그랬다. 시간과 체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결혼 생활과 직장 생활이 본격화되자, 삶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거대한 궤도에 오른 채 점차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본질적 삶의 우선 순위 따위를 지껄이기엔 닥치는 매일이 너무 바빴다.


그러다 보니 삼십육 개월 할부로 질렀다고 언구럭부리던 결혼 당시의 대출을 갚는 날도 왔다. 기특하다. 자, 이번엔 전세자금 대출 차례다. 은행 대출이 가능한 신용 상태인 것, 다달이 원리금을 상환할 수 있는 수준의 맞벌이인 것은 참 다행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빈곤감이 늘 가슴 한 켠을 차지했다. 매달 통장을 잠깐 스쳐가는 월급은 ‘여행은 죽기 전에 할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버킷 리스트로 두라’고 우리를 타일렀다. 그 말이 옳았다. 사실 우리는 그다지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배낭 여행 경험도 한 번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임신을 미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데도, 막상 우리의 서른에서 여행의 가능성을 깨끗이 지우기 전엔 선뜻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즈음 나는 한 보험 회사의 커뮤니케이션 플랜을 잡는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출시 준비 중인 새로운 상품의 키메시지는 ‘설렁탕만  먹고살아도 은퇴 후 몇 억이  필요하다’였다. 한국 사회에서 ‘자칫하면 남들만큼 살 수 없으리’란 공포만큼 효과적인 설득은 없었다. 믿었던 주변의 친구들마저 하나 둘 그런 협박에 넘어가며 영리하게 삶을 단도리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철이 드는 것’이라 했고 누군가는 ‘보수화’라고 했다. 각자 알아서 생존해야 하는 시대이니까, 하고 이해했으나 그것이 못내 쓸쓸한 밤이면 베갯잇이 흥건해지도록 울었다.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통용되는 기준대로 줄 세워 누가 더하고 못한 것이 중요하지 않으리라. 시간도 공간도 소유도 서로 자유롭게 나누며 살리라. 결심이 필요할 땐 언제든 방향을 선회할 수도 있으리라. 돈과 그럴 듯한 사회적 지위 이상의 가치가 삶에 있음을 우리 둘은 ‘아는’ 놈들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알기는 개뿔, 대체 아는 것은 무엇일까.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삶으로 체화되지 못하는 앎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신앙과 관념의 언어들은 익숙했을 뿐, 몸으로 사는 일상에 좀처럼 스며들지 못했다. 말과 삶 사이,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이 속절없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정쩡 양 쪽에 발 걸친 우리 가랑이는 언젠가 찢어질 거야, 다시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조금만 지나면 땅바닥에 온 몸을 밀착하고 흙무더기 움켜쥔 꼬락서니로 입만 살아 “인생은  나그넷길”이라 멋지게 읊조리는 촌극을 연출할 것 같았다. 한 번뿐인 인생, 변죽만 울리다 끝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온다던 서른이, 바야흐로 코 앞이었다.


결정은 예상 밖의 기회를 통해 내려졌다. 남편 회사로부터의 제안이었다. 미국으로 일 년간 파견 근무를 갈 생각이 없냐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묻기 전에 어서 잡으라!’고 종용하는 나와 달리 그는 차분했다. 우리들의 서른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거였다. 그것도 여행이잖아 그냥 여행이라고 쳐, 하는 내 눈을 그는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각각의 선택 이후에, 우리 미래에 주어지는 게 뭘까 상식 선에서 예상해 봤어.”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하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미국에 가면, 진로가 보장될 거야. 나 일하는 동안 넌 공부하면 되겠지. 좀 더 수월하게 위로 갈 수 있을 거고, 나은 연봉을 받고,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도 많을 거야. 예측 가능한 탄탄한 길이지. 그런데 우리 내면이 지금과 얼마나 달라질 지, 그건 잘 모르겠어.. 미국에 가는 건 지금의 삶을 더 단단히 유지하는 일이니까.


반대로 여행을 택한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돈이 없을 거야. 살 집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진로를 바꿀 수도 있고, 그러다 취직이 안 될 지도 모르지. 아무 것도 예상할 수가 없어. 그런데 우리는 지금과 좀 다를 것 같아. 이건 우리가 그 간 살던 것과는 좀 다른 삶의 방식이니까. 주류에서 좀 벗어나 살아도 죽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게 될 지도 몰라. 그럼 이후엔 좀 더 자유롭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외면의 불확실함이냐, 내면의 불확실함이냐. 무얼 택할 거냐.
그 질문에 답해야 할 것 같아.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떠나 보자. 생각대로 살아보자. 그래서 살아진다면 다행이다. 영 망한다면, 역시 주류적 삶은 따라야 할 이유가 있는 거라는 교훈을 남기게 되겠지.


결정을 하고 나자, 떠나지 말아야 할 현실적인 이유보다 떠나야 할 이유들이 더 타당하게 다가왔다. 길 위에서 하루하루를 온전히 우리의 의지대로 꾸리며, 365일 24시간을 오롯이 둘이 동행하는 것.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낭 하나에 꾸린 채 나그네의 삶을 사는 것. 일상의 관성과 사회적 압력의 더께를 걷고 우리가 믿는 신께만 촉수를 세운 생의 감각을 벼리는 것.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삶에 정말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분간하는 시력을 높이는 것. 우리가 관심 있고 안다고 여겼던 분쟁과 난민과 빈곤 같은 이슈들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 오감을 연 채 길 위에서 모든 길을 열어 두고 이후 어떤 모양으로 살면 좋을지 우리들 생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 


진실로 ‘살아 있는’ 것.


우리들의 여건도 새삼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여행을 꿈꿀 수 있는 나라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고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거나, 혈육의 생계가 당장 고민되는 상황이거나,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거나 하는, 실은 오랜 세월 늘 산적했던 여러 현안이 그 시기 처음으로 우리를 비켜갔다. 인생에 찾아오는 몇 번의 기회가 있다면, 지금은 ‘여행의 기회’인 것이 분명했다.


대출 상환 등을 비롯한 몇 가지 상황을 고려해 출발 시기를 조율하자, 실제로 떠나기까지 다시 일 년 반이 걸렸다. 구체적인 준비보다 우리가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 지, 무엇을 기대하는 지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누었다. 회사의 안식월을 이용해 떠난 러시아 배낭 여행으로 우리들의 여행이 가능한 것인지를 가늠해 보기도 했다. 그 후 각자 꼭 가고 싶은 나라를 중심으로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다는 큰 방향을 잡았다. 가급적 육로로 이동하고, 일정은 느리고 유연하게 잡고, 현지 사람들의 방식대로 생활하자는 몇 가지 원칙도 정했다. 예산 계획도 세웠다. 노자는 퇴직금으로 하되, 모자라는 비용은 여행 초반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충당하자는 생각이었다. 예산의 5% 정도는 지인들로부터 후원을 받고, 그 돈은 여행 중 마음이 가는 곳에 나누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퇴사일이 되었고, 출발일도 성큼 다가왔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니?

한 작가는, 생의 마지막 날 문 앞에서 신이 그렇게 물으실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준비한 인생의 진짜 즐거움을 발견했니, 하는 기대에 찬 질문 앞에 그저 벙 찐 표정으로 서 있을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의 마지막 밤에 나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에 감사할까 생각하면 좀 더 쉬워지는 삶의 질문들이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오히려 삶을 생각하게 하는 법이니까.


이 블로그는 그 여행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여행 이후에 관한 이야기다. 긴 여행이 끝나고 그 여행보다도 긴 시간이 지났다. 둘이었던 우리는 셋이 됐다. 우리는 여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여행은 어땠어? 뭘 배웠어? 후회하지 않아?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아? 


쏟아지는 질문에 한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뭐.. 하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얼버무렸다. 그러자 서서히, 아무도 우리에게 묻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사, 편안한 마음으로 입을 연다. 들뜨지 않은 마음으로, 담담하고 솔직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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