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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Jun 10. 2015

기억: 길 따라 덜컹덜컹 튀어나오는

발리로 가는 밤의 버스 안

나는 열 여덟살이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빠의 사무실 집기들이 우르르 처박힌 박스 두 개가 거실에 놓여 있었다. 아빠는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도 좋다고 하셨다. 사무실에 가면 늘 탐냈던 펜이며 메모 패드며 스티커 등등의 것들이 거기 있었다.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긴 했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택하지 못했다. 범접할 수 없는 별세계였던 아빠의 장식장이나 각 잡힌 수트 케이스 같은, 아빠만의 세계에 고이 들어가야 할 물건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곧 엄마와 아빠는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동네에 세탁편의점을 여셨다. 철없는 나는 '그런 일'을 시작한 엄마 아빠에 대한 연민과 부끄러움으로 괴로워했고, 더욱 철없이는, 미숙한 초보 자영업자 부부에게 큰소리치는 진상 손님을 죽여버릴 기세로 건드려 엄마아빠를 더욱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그 시절, '일 인분 삼천원 삼겹살' 류의 저렴한 외식업이 등장했다. 모두가 망하고 쫓겨나고 살 길을 찾아야 했던 때, 삼천원 고깃집은 우리집 세탁편의점의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우리 가게 맞은편에 처음 그런 간판이 걸린 날, 엄마는 기쁜 얼굴로 "우리 오늘 저녁엔 저기에 가 보자!" 했다. 물론, 삼천원짜리 삼겹살이 얼마짜리 생고기와 같을 수 없었고, 삼천원짜리 밥상이 태릉 초가집의 반상과 같을 리 없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생각지도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얼만큼의 차이일지 예상할 만큼 밝지도 못했다.

집은 젓가락을 환히 비추는, 어디 한 군데 구멍난 데도 없이 부서질 듯 얇게 민 그 집 고기는 종이와 고기의 경계는 어디서 갈리는가를 묻는 아트였다. 엄마는 쟁반에 담긴 종이조각같은 고기들을 보자마자 백짓장같은 얼굴이 되어 고기들을 불판에 올리다가, 뜨거운 불판에 채 십초를 견디지 못하고 와그러지는 고기와 함께 허물어지고 말았다. 오래 묵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아빠는, 에이, 왜 그래 이 사람은 참, 하고 타박하며 엄마에게서 집게를 빼앗아 고기를 구웠다. 이 사람은 참, 하는 아빠의 말끝도 그다지 단단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열심히 먹었다. 바로바로 먹지 않으면 새카맣게 타 버릴 것 같은 고기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 시절 '야자'라는, 국영수보다는 야근을 선행 학습하던 비효율적 강제 야간자율학습이 있었다. 선생들은 고 3 주제에 동네 극장 구석에 숨어 '타이타닉'을 보는 나 같은 미꾸라지들을 다루는 방법, 본인들의 야근과 피로를 줄이는 방법으로 '학부모 감독제'를 도입했다. 만만한 건 반장 엄마라, 우리 엄마는 한 달에 한두 번 세탁편의점 정리를 아빠에게 맡기고 학교에 왔다.

그런데 야자 시간에 교실 천장에 야광별이나 붙이던 내가 탐탁한 반장이 아니었듯, 엄마 역시 감독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는 아이들은 푹 자게 놔두었고, 지지난 주에도 지난 주에도 이번 주에도 생리통이 심하다는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 달 내내 생리 중인 저 놈은 집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하는데 싶은 아이들에겐 저런,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에 가도 좋다는 사인을 내렸다. 엄마가 학교에 와 늘 제일 먼저 한 일은 우리 교실 창문을 똑똑 두드리고 방가방가, 내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일이었다. 내 참, 선생님들이 이걸 알까.

종일 세탁편의점에서 시달린 끝의 그 피곤한 야밤에, 엄마는 정말이지 아주아주 행복해했다. 벚꽃 흐드러지던 나무가 맨몸이 될 때까지, 그 해 내내, 때로는 걷고 때로는 피로가 꼭꼭 들어찬 만원 버스를 타고 집에 오던 밤, 엄마는 늘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자주, "엄마한텐 이 시간이 몹시 소중해." 하고 꼭 잡은 내 손에 꼭꼭 눌러 담듯 말했다. 엄마는 교복 입은 너를 보면 가슴이 아릿할 때가 있어. 교복 입은 우리 따니랑 이렇게 손 잡고 밤길 걷는 날, 야자하는 우리 따니를 기다렸다 집에 올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어. 생각해 봐, 정말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구. 엄마는 학교 오는 날이 아주 고맙고 행복해. 소중하고 또 소중하지.

그 사심 가득한 야자 감독이 오는 날이면, 나는 오후부터 설레였다. 그리고 그 날들은, 엄마 말보다도 훨씬 짧았다. 그 후로 벌써 십년도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으나, 엄마가 꼭꼭 눌러 준 그 시간은 내 안에 고이 남았다. 나는 엄마에게 그런 많은 '순간'을 물려 받았다....

덜컹

하는 충격에, 생각이 잠시 끊겼다. 비포장 도로에 들어선 버스가 쿵쾅쿵쾅, 잠자던 사람들이 이리저리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지금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발리로 향하는 버스 속에 있다. 덜덜덜덜, 어느새 진동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다시 잠에 빠져들고, 나는 더 먼 옛날로 빠져들었다.


... 간혹, 깊은 밤, 늦게 들어오신 아빠가 방문을 열고 자는 나를 가만히 다독일 때가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바깥 공기와 인기척에 잠이 깨 징징거리며 짜증 섞인 잠투정을 하면 아빠는 그랬다. 아, 아빠가 우리 애기 깨웠어? 아무것도 아냐, 자, 다시 자, 아빠가 미안해, 다시 자- 서둘러 이불을 여며 주고 나가는 아빠가 닫는 문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도 늘 그제사 잠이 깼고, 정신이 또렷이 들었다. 그러면 남겨진 어둠 속에서 나는 훌쩍훌쩍 울었다. 그게 아닌데, 아빠 내 옆에 더 있어도 되는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유독 아빠가 미안해, 하는 말은 늘 그렇게 아프게 가슴에 박혔다. 본데없는 자식처럼 끝간데 없이 아빠를 증오하던 시절에도, 간혹 그 밤처럼 자다 일어나, 그게 아닌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하며 가슴팍을 꾹 누르며 어찌할 바 모르던 날들이 었었다. 아빠와 함께인 시간이 그렇게 짧으리라고는, 다시 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안엔 아직도 용서 못한 내가, 용서가 필요한 내가 있다. 잊었다 괜찮다 생각했지만, 간혹 생각날 때마다 가슴에 눈물이 찰랑이는 기억들이 있다. 이제는 그 모두가 생의 일부라는 것, 억지로 지우거나 극복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그저 때마다 눈물에 잘 씻어 두어야지. 때로는 떠오를 때마다 먹먹한 가슴을 견디며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용서해야지. 유독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떠날 때면 자주, 그런 내가 말을 건다.

인기척을 느낀다. 잠들었던 장군이 스르르 일어나 나를 들여다본다. 만나서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옆지기가 된 세월이 벌써 십 년인 그는, 먼 길 가다 난데없이 눈물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아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그저 목 뒤로 팔을 뻗어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머리를 기울인다. 나 역시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어차피 입으로 꺼내면 곧 빛이 바래는, 더 오래 가슴에 두어야 할 이야기들이다.

장군은 다시 잠이 들었다. 나도 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발리까지는 아직도 세 시간을 더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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