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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희년을 기다리며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3년 12월 기고문

또 한 해가 저문다. 매일 뜨고 저무는 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것 없다고 짐짓 의연한 체하는

머리와 달리 마음은 벌써 지난 시간을 갈무리 중이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 년, 돌아온

터전에서 여행의 경험을 섞으며 사는 삶은 안팎으로 다소 진통이 있었다. 밥벌이의 종류와

형태를 바꾸고, 사는 동네와 만나는 사람들의 성격도 조금 달라졌다. 여행에서 이어져 흐르듯

자연스러운 변화였음에도 적응이 필요했고, 때로는 가족과 지인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특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택한 ‘경제적으로 약간 모자란 삶’은 시간과 관계, 마음 등 우리

삶의 총량이 둘 다 풀타임으로 일하던 이전보다 훨씬 풍족해지는 결과를 낳았지만, 지인들은

좀처럼 걱정과 염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안 그래도 걱정스러운데 임신과 출산을 겪는

우리의 부실한(?) 준비가 주변의 걱정을 더욱 돋우기도 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당장 앞으로 한 달에 얼마는 더 들어갈 텐데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그래서 간혹 생각한다.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다시 한 번 결정의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할까. 그러나 떠나지 않았을 경우 중 최상의 케이스를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여행을 선택하리라는 데 남편도 나도 이견이 없다. 태어난 아가를 생각해도, 몇 년 더 같은

자리에서 일해 모았을 돈이나 안정적인 지위보다는 여행이 아니었다면 다듬을 기회가 없었을

지금 우리 삶의 방식과 내면으로 그를 맞게 된 것이 보다 감사하다.


남편은 서른에 일어난 여행이 우리 삶의 첫 번째 ‘희년’ 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학자금과 결혼, 전세 대출금 등 여러 빚을 청산한 시점이기도 했거니와, 정신 없이 바쁘고

빡빡했던 삶에 빚진 시간과 관계와 건강이 돌아왔고, 그를 아낌없이 나눌 기회도 주어졌다.

그리고 여행은, 생각하고 실행하기까지의 몇 년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앞날’에의 불안에

휩쓸리지 않고 삶을 꾸릴 수 있는 저 앞의 말뚝이 되어 주었다.


그 옛날에도 희년은 공동체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상상해 본다.

구체적으로 정해진 미래에 그 간 모아 두었던 재산이나 쌓였던 빚이 정리되고, 가졌거나

빼앗겼던 땅이 회복되고, 노예의 삶에서 해방되리라는 것을 안다면 어떨까. 소유나 지위가

영원히 축적될 수 없다는 실제적 가르침이 있었으니, 삶의 자리나 방식에 좀 더 유연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올 해를 뒤로 하며, 내년이 아닌 다음 ‘희년’을 생각한다. 우리 원대로 다시 십 년 후가 될 지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온통 흔드는 이 작은 아기가 성년이 된 후가 될 지 알 수 없지만, 그 날을

고대하고 기다리면 오늘 엄마 아빠로서의 삶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원을 가늠할 수

없는 어리석은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짧은 끝, 새로운 시작을 목표하며 사는 것이 오히려

영원을 생각하고 맛보는 방법인 것 같다.


모두에게 지난 날의 감사 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소망이 움트는 연말 연초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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