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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형일 Feb 22. 2022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2.02.20. 당신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대통령의 염장이

룰루밀러 (2021, 12, 17).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지인(역). 곰출판. 

“자연의 복잡한 분류 단계는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다. 자연엔 가장자리도, 불변의 경계선도 없다. 우리가 이름 붙여주지 않아도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미국 어류 분류학자로 스탠퍼드대 초대 총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을 조명하면서, 사랑도 잃고 삶도 끝장났다고 생각한 어느 과학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이색적인 자연과학책이다. 

룰루밀러가 친밀하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들려주는 이 책은 한 인간의 과학에 관한 고군분투 스토리이면서, 사랑과 상실, 혼돈에 관한 이야기란다. 나아가 신념이 어떻게 우리를 지탱해주며, 동시에 그 신념이 어떻게 유해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는데… 

안으로 조금 들어가보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19세기에 활동한 생물학자(분류학자)다.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뭇가지 형태로 뻗어나가는 생명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관계를 밝혀내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가 발견해서 직접 이름 붙인 물고기의 수는 당시 인류에 알려진 어류 중 거의 5분의 1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감춰져 있던 생명의 나무에서 그가 밝혀낸 부분이 많아질수록 우주는 더욱 집요하게 그의 일을 방해한다. 수집한 수많은 표본들은 벼락으로 화재로 파괴되었고,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유리단지에 보관해둔 1천여 종의 물고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한순간에 그가 쌓아온 모든 업적이 박살 난 것이다.

이 정도 일을 겪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에 굴복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드라마의 주인공 조던은 자기 발치에 널브러진 파괴의 잔해들을 훑어보고는 거기서 식별할 수 있는 물고기를 집어올린 뒤 다시 자신의 컬렉션을 구축해나갔다고 한다. 

저자 룰루밀러는 이 일화를 처음 들었을 때 조던을 바보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조던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인생을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이 과학책은 그 추적기라 봐도 되겠다. 한 인물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이 완전히 뒤바뀐 놀라운 사건이기도 하면서... 

“내가, 우리가 얕잡아봤던 것들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 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_p. 55.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_p. 95.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_pp. 141~142.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_p. 189.


다윈이 나타나 신의 계획이라는 관념이 허상임을 폭로했을 때, 데이비드는 지구의 피조물들이 우연히 생겨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완벽함의 계층구조에 관한 관념을 유지하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애썼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천천히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이 더 적합하고, 더 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더 진화된 생명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_pp. 204~205.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_p.227


우리가 어류에 대해 해온 일이 바로 이와 똑같다. 수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 몰아넣은 것이다. _p. 240.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_pp. 263~264.


최진영 (2022.1.14).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한겨레출판.

여기 ‘이름조차 행방불명된’ 소녀가 있다. 아빠에게 백칠십두 번째로 맞고 엄마가 백삼십다섯 번째로 밥을 굶긴 어느 날, 소녀는 자기를 못살게 굴던 부모를 ‘가짜’로 만들어버린 후 집을 나온다. 소녀는 오직 ‘진짜’에 대한 물음 하나만 가지고 ‘지극히 못된 방식으로, 유혈 낭자하게’, 자기가 찾는 것을 향해 후미진 세상 구석구석을 떠돌기 시작한다.

소녀의 걸음이 닿은 곳마다 불행은 즐비했다. 마치 음극이 양극을 끌어당기듯 불행한 소녀 옆을 스치는 사람들 역시 하나같이 ‘못나고 실패해서 가짜 취급 받는 생애’들이다. 소녀는 그들 안에서 행복을 찾기도 하고, 살아 있는 ‘평화’를 꿈꾸기도 하지만 매 순간 또 다른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 때문에 자신의 소망에 균열이 일어난다. ‘누군가가 웃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울어야 한다’는 소녀의 깨달음은 피해자가 피해자를 가해하는 우리 사회의 잔혹한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소녀가 세상의 고통을 만날 때마다 혹은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에서 비켜서야 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그러나 애써 외면하는 슬픔, 박탈감, 외로움, 허무감같은 것. 이 소설은 독자들이 각자의 이유로 묻어두고 외면했던 상처들 앞에 스스로 서게 만드는 강렬한 힘이 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이 치유의 과정으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내가 진짜부모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짜부모가 너무 고약했기 때문이다. 가짜아빠가 나를 백칠십두 번째로 때리고 가짜엄마가 백삼십다섯 번째로 밥을 안 주던 늦겨울 밤, 나는 확신했다. 이 사람들은 나의 진짜부모가 아닌 게 분명해. 그들은 길바닥에 버려진 장갑 줍듯 나를 주워온 거다. 나는 재작년에 숫자 세는 법을 익혔다. 손가락 없이도 숫자를 셀 수 있게 되자마자 가짜아빠가 나를 때리는 횟수와 가짜엄마가 밥을 안 주는 횟수를 차근차근 셌다. 숫자가 커질 때마다 더러운 이불을 목구멍으로 마구 쑤셔 넣는 기분이었다. 나는 백이 세상에서 가장 큰 수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짜아빠가 백한 번째 나를 때리던 날, 백보다 더 큰 수를 알게 됐다. 그건 천이라는 수였는데, 백이 열 번은 모여야 되는 수라고 했다. 천보다 더 큰 수를 알게 될 때까지 계속 맞을 생각을 하니 정말이지 만사가 지긋지긋했다. _p.13


나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보고 듣고 짐작하는 천년의 세월을 살았다. 태어나서는 그보다 훨씬 지독한 세월을 단숨에 견뎌냈다. 맞고 때리고 지르고 울고, 부수고 찌르고 할퀴고 물고, 박살 내고 집어 던지고 다치고 도망가고, 닦고 짓이기고 삼키고 내 혀부터 씹어대는 그런 것들. 입으로 주먹으로 나불댈 줄만 아는 백곰은 내가 아는 것의 천만 분의 일도 모를 것이다. _p.55


사랑한다는 말은 어떻게 표현하지? 오랫동안 그 문제로 고민을 했지만, 사랑한다는 걸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할머니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은 할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벽에 그 글자를 붙여두기만 했는데, 할머니는 가끔 그 글자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맛있다. 밥 먹어. 잘 잤어. 할머니가 ‘사랑해’란 글자를 보며 상상하는 어떤 단어든, 결국은 다 사랑에 포함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원래 그런 거니까. _pp.86~87


불행으로 살 수 있는 건 동정뿐이다. 동정은 아무 힘이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나는 동정받는다고 느낄 때 가장 비참했다. 그건 내게서 즐거움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거니까. 나를 동정하는 사람의 마음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차라리 불행할 것이다. 대장과 달수 삼촌은 내게 그 이치를 가르쳐줬다. 불행을 주긴 쉽지만 웃음을 주긴 어렵다는 걸. 우리가 웃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어디 한번 해보시지’라는 눈빛을 마구 뿜어냈다. 사랑하던 사람이 도망가고, 돈을 다 잃고, 마음속엔 활활 불이 타올라도 우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웃어야 했다. 그럼 우리를 보는 사람도 웃었다. 웃다가도 어쩔 수 없이 울면, 우리를 보는 사람도 울었다. 그 눈물에, 표정에,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위안을 받았다. 그건 동정이 아니다. 같은 마음이다. 그렇게 울고 웃는 사이 불행은 평범해졌다. 평범해진 불행엔 힘이 없다. 그냥 그까짓 것이 된다._pp.243~244


하루하루는 쏜살같이 흘러가는데 돌아보면 늘 제자리고 무심결에 손을 베듯 몸과 마음에 상처가 났다.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고 낯모르는 애들과 말을 섞고 어른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 맨살을 다 드러내며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쩔 거냐고, 이건 내 몸 내 정신 오직 나만의 것이니까 씨발, 관심 끄라고 대거리를 하면서도 깡마른 고양이처럼 눈빛은 언제나 불안하게 흔들렸다. 깨달음과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오니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결국 혼자 남아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고 내 상처를 내 혀로 핥으며, 굶주림과 공허함에서 허덕이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p.266


용역과 경찰은 오랫동안 사귄 친구처럼 담배도 나눠 피우고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면서 농담도 했다. 맞은 사람은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그들의 얼굴을 어딘가에서 본 듯했다.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고,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풍경 같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일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에 몸을 떨었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 아니라, 날마다 같은 날.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변할 뿐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틀과 원리는 어디든 비슷해서, 맞는 사람은 늘 맞고 으스대는 사람은 늘 으스대며 때리는 자는 늘 때리는 자다. 그것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알 순 없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것을, 그런 이치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그들의 뜻대로 굴러간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반쯤 헐린 나의 공간에서 지켜보았다. _pp.285~286


유재철 (2022, 02, 10). 대통령의 염장이 : 대한민국 장례명장이 어루만진 삶의 끝과 시작. 김영사

상실의 슬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뒤에 가려진 삶의 현장, 그곳을 30여 년간 묵묵히 지켜온 어느 염장이의 기록이다. 노무현·김대중·김영삼·노태우 등 여섯 분의 전직 대통령과 법정·숭산 등의 큰스님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 등의 재벌총수, 이매방 무용가, 여운계 배우, 이경해 열사 등 우리 사회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장례지도사 유재철이 이야기하는 수천 가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란다. 

이야기는 총 2부로 구성. 1부 ‘수천 가지 죽음의 얼굴’에서는 무연고자부터 대통령까지, 이주노동자부터 재벌총수까지 각계각층의 장례를 이끌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2부 ‘웰다잉 안내자’에서는 죽음과 장례의 본질에 대해 다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살아가는 한 장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그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pick~~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아픔 없는 사연이 어디 있으랴. 비록 색깔은 저마다 다르지만, 내가 보내드린 모든 분의 삶과 죽음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있었다. 늘 그 무게와 마주하며 살다 보니,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낼 수 없게 된다. _p.13


세상에 대한 미련과 욕심은 의외의 것에서 발동된다. 돈, 부동산, 명예, 지위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가장 큰 집착의 대상이 될 것 같지만, 의외로 죽은 이들의 손안에 든 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들이다. 스님이 손에 쥔 감나무 가지처럼 말이다. _p. 65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우리는 ‘내일’이 당연할 줄 알고 살아간다. 나는 사고의 순간 까딱하면 ‘내일’을 맞지 못할 뻔했다. 후회 없이 산 인생이 잘 산 인생이라는데, 우리는 매일 후회할 일을 하며 산다. 죽기 전에는 후회할 일을 청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죽음의 기로에 서보니, 매일 후회할 일을 반성하지 않으면 죽기 전에 그 일을 청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_pp. 2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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