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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형일 Mar 01. 2022

아무튼 무대, 초인적 힘의 비밀

#22.02.27 바다의 긴 꽃잎 

황정원 (2022, 02, 22). 아무튼, 무대 :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 시간을 축제처럼 만끽하는 수밖에 없다. 코난북스.

무대에 대한 작가의 참을 수 없는 애정과 생각들을 골라 담았다고 한다. 무대 위의 감동, 무대 뒤 스태프들의 진땀, 커튼이 내려지고 난 뒤에 흐르는 안도와 성취의 공기들, 음악과 무대의 길로 들어선 후로 맞닥뜨린 갈등과 고뇌의 순간들, 그 결과로 마음에 차곡차곡 쌓은 깨달음들을 써내려간 “아무튼 무대”라는데.. 

겪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애정한다. 질감이 다른 거다. 공연을 무사히 올리기 위한 스태프들의 백스테이지 이야기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런던에서 공수한 무대세트, 클라이맥스에서 터져야 할 불꽃의 오작동,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지는 사건사고, 공연을 준비하며 배우와 스태프가 만나는 대본 리딩 날 풍경, 오페라 자막을 고르고 고르는 그린룸 풍경 등등 커튼 뒤, 무대 뒤 내밀한 이야기의 매력이, 자기 일에 흠뻑 빠져 몰두하는 이들의 매력이 이 에세이에 담겼다고 한다.

개인사적으로 이 책은 무대에 대한 사랑을 찾아 돌고 돌아온 한 사람의 긴 여정의 기행문과도 같다고도 하는데... 과학도의 길을 착실히 걷다 돌연 음악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무대를 업으로 삼게 된 사람.  바꾼 경로를 따라 공연 기획 일을 하다 오페라를 공부하러 유학을 떠난 한 사람의 좌절, 고뇌, 낙담, 희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데…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휘청거리더라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하리라는 믿음"

"스스로를 믿어주고 천천히 내 이야기를, 내 세계를, 나만의 바다를 만들어 넓혀가겠다는 결심"

이 모든 게 방황과 고뇌의 시간 속에서 얻어진 결론이라는데…. 누구나 생에서 거듭 겪을 이 좌충우돌 이야기를 무대라는 스펙타클한 쇼의 배경과 교차해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진다. 


우리는 모두 같은 대본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스태프들이 그 안에서 찾은 포인트는 제각각이었다. 지문을 만난 그들은 벌떡 일어나 우르르 옷장 문을 통과해 데드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훈련된 전문가의 눈으로, 각자의 인생을 쌓아온 방식으로 무대를 둘러보고 연습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스태프들이 그은 밑줄들은 서로 충돌하고 섞이다 맞물렸다. 가려져 보이지 않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여러 층위가 생겼다. 그리고 각자의 해석들이 모여 하나의 장면을 만들고, 그 장면들이 모여 하나의 극이 되고,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_p.21.


그 세계는 출발 전에 내가 꿈꾸던 세계와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 또한 괜찮았다. 나 또한 갈등과 마찰로 모양이 바뀌고 색이 달라져 새로 찾은 세계와 아귀가 맞물리도록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결정에 의해 다시 헤매게 되더라도 불안에 내몰리지 말고 헤매는 데 몰두해보자. 그렇게 나 역시 내가 겪고 있는 갈등에서 조금씩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_p.39.


준비가 되었든 아니든,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되면 막은 올라가야 하고 공연은 시작되어야 한다. 도망칠 수도 없고 늦출 수도 없는 것이 시간이다. 카드 돌려 막듯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해야 할지라도 막은 올리고 봐야 한다. 그리고 막이 오른 공연은 반드시 끝까지, 마지막 음표까지 불러야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다. _pp.72-73


나도 그럴 것을 그랬다. 터무니없는 말을 하게 될까 두려워 침묵만 지키고 있지 말걸 그랬다. 완벽하자고 욕심 부리지 말걸, 그래서 지금 완벽하지 못함에 늘 움츠려 있지 말걸 그랬다. 남들을 따라잡으려 오버하지 말걸, 처음부터 내 페이스대로 갈걸, 타인의 선함을 믿고 내 부족함을 선선히 보여줄걸, 그들이 설사 선하지 않아 내 부족함을 비웃더라도 내 잘못이 아니니 크게 흔들리지 말고 뚝심 있게 행동할걸…. 무엇보다 스스로를 믿어줄걸. 그렇게 천천히 내 이야기를, 내 세계를, 나만의 바다를 만들고 넓혀갈걸 그랬다. _p.111


슬픔, 원망, 외로움, 두려움, 증오…, 어두운 감정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찰랑찰랑 차올라 위험 수위에 접근하면 떨리는 손으로 약장 속 진통제 찾듯 오페라를 찾았다. 지난 10여 년간 오페라를 찾아 유럽 전역을 부지런히 돌아다닌 보람이 있었다. … 나는 나락에서 몸부림치는 인물들이 가장 비참한 순간 부르는 노래들을 꿰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 감정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최대한 증폭시키는 데 가장 적절한 아리아를 세심하게 골랐다. 나는 나의 가장 믿을 만한 바텐더이자 소믈리에인 동시에 주치의였다. 감정에 적절한 장작을 넣고 불을 지펴 끓어 넘치게 만들면 당분간 버틸 수 있었다. p.146.


앨리슨 백델(2021, 11, 05). 초인적 힘의 비밀. 안서진(역).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풍부하게 다룬 그래픽 노블이란다. 폴리아모리, 독신, 온라인 만남, 알코올, 약, 명상, 정신 건강, 나이듦, 죽음이라는 주제를 두루 건드리는데, 이유는 하나. 그게 저자의 삶과 시간 어딘가에 흔적을 남겨두었기 때문.  

십 대와 이십 대에 다양한 운동과 커뮤니티를 통해 은밀한 기쁨을 발견하고, 삼십 대와 사십 대에 창작에 몰입하며 용감무쌍하게 나아가던 저자 벡델은 ‘텅 빈 느낌’을 수시로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뮤지컬 『펀 홈』의 성공, 판권 계약 등 작가로서의 기쁨도 잠시 일중독으로 인한 이별, 갱년기 변화, 어머니의 죽음, 911테러라는 대재앙까지…. 오십 대에 닥친 트럼프의 독재 정치와 캘리포니아 산불도 음주를 부추긴다. 

저자의 몸부림은 치열했다. 창작, 명상, 심리 치료, 고강도 피트니스. 그 무엇도 온전한 해답이 되지 않지만 이 책은 가슴 저릿한 회복의 연대기를 지향하는 듯 싶다. 한편 이 책은 운동을 매개로 문학과 카운터 컬처, 동양 철학과 불교의 깨달음을 동시에 다룬다고 하는데... 

뭔가 저자의 일상이 초인이 아닌 보통 사람의 눈높이에서는 너무 번잡해 보이기도 하는데, "하루 단 몇 분으로 초인이 되는 기술을 알려 준다?”니 약간 훅하는 게 있다. 일상을 회복하려는 모두를 위한 운동 회고록이라는 컨셉 자체가 색다르고, 순한 맛에서 매운 맛까지 온갖 운동 탐구 생활을 마주할 수 있다는 기대감?


세상이 미쳐 버렸어! 평화주의자들이 신병 훈련 스타일로 체력 단련을 하고! 페미니스트들은 폴 댄스를 배우지! 괴짜들은 트럭 타이어를 들어 올리고! 새로운 유행은 계속돼! 요가는 고행자나 수염 기른 공동체 사람들이 하던 운동이었지만…… 이젠 탄두리 치킨만큼 도처에 널렸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우리를 광란의 심폐 운동으로 몰아가는 공허함의 정체는 뭘까? 후기 자본주의의 정신적 도덕적 붕괴? 온라인 공간에 장시간 머무르며 생겨난 신체와의 분리감? 식스 팩을 만드는 데 6주밖에 안 걸린다는 게 인간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증명해 보고 싶어서?  _pp. 14~15


운동화 가게에서 본 소책자가 내 눈을 사로잡았지. 길고, 느리게, 장거리 달리기. 인간적인 방법으로 운동하기. 길고 느리게 장거리를 달린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어. 하루는 보통 뛰던 코스를 다 돌고 계속해서 뛰다가 집을 지나치고 또 한 번 더 뛰었어. 한 바퀴 돌 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이 일상을 보내는 모습을 지나치다 보니…… 가족들이 시간에 갇힌 것 같았어. 나는 점점 더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초월. 한계를 뛰어넘어. 그날 내가 뛸 수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 분명히 더 멀리 뛰었어. 신체적 한계를 넘어섰지. 습한 저녁 밤공기와 섞이면서 나 자신의 한계도 녹는 것 같았어. 찾았냐고? 초인적 힘의 비밀을? - 1970년대 10대, pp. 79~80


아빠 장례식을 치른 지 한 달이 지나고, 스무 살 생일을 맞기 한 달 전이었던 시점에 새 여자 친구 조앤과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로 떠났어. ‘음악 축제’라는 이름은 그 본질을 살짝 가렸지. 물론 음악이 있었어. 하지만 그 주말은 마치 유토피아에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실험이었어. 그야말로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여성들의 반란이었지. 내가 원하는 일은 바로 이 축제에 참여하는 거였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어! 자신과 타자라는 경계가 바로 무너졌지. 서열이 사라지고 공동체가 생겼어! 마침내 카운터 컬처로 향하는 길을 찾은 거야! 「전 지구 카탈로그」가 현실로 튀어나왔어! 특이한 차이점 하나만 뺀다면……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어. 남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거든. .. 놀라운 공허함 속에서 나는 아찔한 관점의 변화를 겪었어!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된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거든. 가부장제에 의해 거부된 몸이 이곳에서는 분리된 무엇이거나 ‘타자’-자연도 포함해서-가 아니었어. 중심으로 돌아왔지. 여기 모인 사람들은 살충제, 핵무기, 근본주의, 헤게모니, 서양의학, 다이어트, 전쟁, 그 모든 것이 지겨웠어. - 1980년대 20대, pp. 101~102


나 또한 명확한 목표 의식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지……카툰과 가라테 연습이 더 큰 프로젝트의 일부라는 확신. 새롭고도 낯선 단어가 내 사전에 들어왔어. ‘커뮤니티’ 어쩌면 가라테의 진짜 매력은 바로 그거였는지 몰라. 동시에 움직이고 숨 쉬면서 다 같이 무아지경에 빠져 하나가 되는 경험. 당시, 곳곳에 생겨난 에어로빅 수업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지금으로 말하자면 소울사이클, 발레핏, 크로스핏처럼. - 1980년대 20대, p. 117


다음 날 일어났을 땐 세상이 재미없어졌어. 무엇에도 흥미를 못 느꼈지. 식욕도 사라졌어. 다음 날도 그랬고, 그다음 날도 그랬어. 어떤 때는 착 가라앉은 기분이 약간은 괜찮아진 것 같았다가, 저녁이 오면 안개처럼 다시 가라앉았어. 술 마시면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 그래서 술 마시고 취하는 것도 다 관뒀지. 매일 운동했어. 하지만 이번에는 텅 비고 헛된 느낌을 견딜 수 없었어. 뭔가 단단히 잘못됐지. ……우울은 곧 괜찮아졌지만, 더 깊숙한 내면을 풀어내는 작업은 여러 해가 걸렸어. 심리 치료를 시작한 지 일 년 반이 지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영하 17도까지 내려갔던 미네소타의 추운 저녁, 친구와 함께 요가반 첫 수업에 갔어. 언제나 그랬듯, 뭔지 전혀 모르면서 발을 들였지. 금세 편안해졌어. 맨발 아래 딱딱한 마룻바닥, 다른 몸들…… - 1980년대 20대, pp. 123~124


“그나저나 대체 다르마가 뭐야?”“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지. 행위가 우주와 조화를 이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우주를 관장하는 법칙 또는 원리를 뜻하기도 해. 좀 확장해 보자면,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 든 현상이야. 산스크리트어로는 ‘진리’를 뜻해.” “대체 세상에! 한 단어가 그 모든 것을 뜻한단 말이야?” - 1990년대 30대, 138p


기쁨과 고통이 공존하며 뒤섞인 그 상태는 사실 내게 기쁨을 안겨줬어. 바로 이 순간 고통을 누르고 기쁨만 느낄 수는 없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이해됐어. 그리고 고통을 느끼는 것은 고통을 피하려고 불안에 떠는 것에 비하면, 거의 기쁨 비슷한 감정에 가까웠어. 사실, 기쁨이란 존재가, 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가능하거든. - 1990년대 30대, 158p


이사벨아옌데 (2022, 02, 15). 바다의 긴 꽃잎.  민음사.

 『영혼의 집』 이사벨 아옌데 작가의 최신작이다. <영혼의 집>을 애정했던 독자로서 기다리던 이야기.  양극화의 시대에 사랑과 우정, 연대를 촉구하는 뜨거운 소설이란다. 스페인 내전을 겪은 주인공들이 파시즘의 광풍을 피해 세상 건너편 칠레로 망명을 떠나 그곳을 또다른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뿌리를 내리는 기나긴 여정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사벨 아옌데가 이 소설에 처음 붙인 제목은 ‘항해(Navefaciones)’였다. 판데믹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손을 뻗어 사랑과 우정을 나눠야 한다고 뜨겁게 촉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제목이었다는데..

1938년, 스페인 내전이 한창인 카탈루냐 지방. 의대생인 빅토르 달마우는 끊임없이 전장에서 이송되는 군인들을 치료하며 바쁜 날들을 보낸다. 열렬한 공화주의자이자 음대 교수인 아버지 마르셀과 시민군에게 글을 가르치는 어머니 카르메가 사는 집에는 이제 그들이 딸처럼 데리고 사는 음대생 로세르만이 남아 있다. 빅토르의 동생 기옘 역시 반란군에 입대해 마드리드 전선에서 전투 중이다.

내전에서의 승리는 요원해 보이고, 아버지 마르셀 달마우는 공화국의 암울한 미래를 예감하며 전쟁 중에 숨을 거둔다. 달마우의 동생 기옘은 아버지의 제자인 로세르와 사랑에 빠지지만 얼마 안 있어 전투에서 사망하는데, 로세르의 뱃속에는 둘의 아이가 잉태되어 자라고 있었다. 

동생의 전사 소식을 차마 전하지 못한 빅토르는 동료 아이토르에게 어머니 카르메와 로세르의 피신을 부탁한다. 만삭의 로세르, 카르메와 아이토르는 프랑스 국경을 향해 피난길에 오르고, 어느 날 밤 카르메는 두 사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남은 둘, 아이토르와 로세르는 천신만고 끝에 피레네산맥을 넘고, 로세르는 포로수용소에 넘겨졌다가 조산원으로 거처를 옮겨 아이를 낳는다.

한편 빅토르 역시 이런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같은 수용소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그의 행방을 찾아 나선 아이토르와 재회하고 로세르와도 다시 만난다. 빅토르는 스페인 난민들을 싣고 칠레로 갈 위니펙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칠레 정부의 위임을 받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찾아간다. 그러나 직계 가족만 동행 가능하다는 조건 때문에 동생의 사망을 로세르에게 알리고, 로세르와 빅토르 둘은 서류상의 부부가 되어 2천여 명의 난민들과 함께 위니펙호에 오른다.

1939년 전쟁이 끝나고 파시스트 군부의 손에 들어간 스페인에서 탈출한 난민들이 맞닥뜨린 냉혹한 국제 현실 속에서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국가가 칠레였다. 칠레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스페인 난민들을 공식적으로 받아 주었고,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한 이가 파블로 네루다다. 그는 프랑스에 수용된 난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 칠레 대통령에게 전해 프랑스 주재 특별 영사로 파견되어 난민들의 망명을 도왔다. 그 과정이 이 소설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주인공은 남성인 빅토르이지만, 이사벨 아옌데의 다른 소설들처럼 『바다의 긴 꽃잎』에는 삶의 의지로 가득 찬 강인한 여성들이 여럿 등장한다. 만삭의 몸으로 고된 피난길에 올라 결국 자유의 국가 칠레로 건너간 로세르,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자기 삶을 놓지 않은 카르메, 전쟁터의 어린아이들을 위해 삶을 바친 엘리자베트, 자기 안의 열정에 솔직히 화답하고 또 그 열정이 남긴 상처를 이겨내어 새로이 태어난 오펠리아.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시대에도 굳은 의지로 삶을 개척해 나아가는, 주인공 빅토르보다 용감하고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페미니즘이란 결국 타인에 대한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

20세기 초중반 스페인 내전과  피노체트  군부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삼고있지만,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떠오를 것 같기도…

“Peace for Ukraine”


“안녕? 나 기억해요?” 엘리자베트가 독일어의 후두음이 강하게 느껴지는 스페인어로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그녀가 기억나지 않는단 말인가. 하지만 빅토르는 그녀를 본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들은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 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그녀는 군용 수통에 담은 차를 마셨다. “당신 친구 아이토르는 어떻게 됐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대로예요. 늘 총탄 속에서 흠집 하나 없이.”
“그는 무서운 게 전혀 없나 봐요. 그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전쟁이 끝나면 무슨 계획이 있어요?” 빅토르가 그녀에게 물었다.
“다른 전쟁을 찾아가는 것. 늘 어딘가에는 전쟁이 있거든요. 당신은요?”
“당신이 괜찮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도 있는데.” 그가 수줍음으로 목이 잠긴 채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그녀가 한바탕 웃더니 예전의 르네상스 처녀로 잠시 돌아갔다.
“정신이 나간다고 해도, 당신이나 그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 없어요. 나는 사랑할 시간이 없어요.” _pp. 23~24.
로세르가 아이토르의 손을 잡아 자기 배 위로 가져가서 태동을 느껴 보게 한 걸 보면, 그녀가 아이토르의 걱정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아이토르, 걱정하지 말아요. 이 아이는 안전해요. 더는 만족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녀가 연달아 하품하며 말했다. 그제야 비로소, 너무나도 많은 죽음과 희생, 너무나도 많은 폭력과 악행을 지켜본 그 유쾌하고 다혈질인 바스크 남자는 로세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흐느꼈다. 그 순간 그는 그녀의 체취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그녀 때문에 울었다. 그녀가 아직 혼자가 되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옘 때문에 울었다. 기옘은 절대 아들을 만날 수 없을 테고, 다시는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간 카르메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 때문에도 울었다. 그는 너무 지쳤고,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행운을 의심했다. _p. 96.


1939년 8월 4일, 보르도. 한여름이었던 그날은 빅토르 달마우와 로세르 브루게라를 비롯해, 그 길쭉한 남미 국가로 떠나는 이천 명 넘는 스페인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었다. 그들은 바다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산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 나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네루다는 그 나라를 “하얗고 새까만 거품의 허리띠를 두르고, 바다와 포도주와 눈으로 이뤄진 기다란 꽃잎”이라고 정의했다…….하지만 그 시는 망명자들에게 자기네 목적지가 어떤 곳인지 확실하게 밝혀 주지 못했다. 지도 위의 칠레는 길쭉하고 먼 나라였다. 사람이 몇 분마다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보르도 광장은 바글바글 들끓었고, 새파란 하늘 아래 더위로 거의 숨이 막혀 죽을 듯했다. 기차와 트럭, 그리고 사람으로 꽉 찬 차량이 속속 도착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민 수용소에서 바로 나와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몰골에 굶주리고 쇠약했다. 남자들이 아내와 자식과 몇 달 동안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부부와 가족의 재회는 감동과 열광의 드라마였다. 사람들은 차창에 매달린 채 목청껏 이름을 부르고 서로 알아보고는 울음을 터뜨리며 끌어안았다. 에브로 전투에서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아버지, 마드리드 전선에서부터 서로 소식을 전혀 모르고 지냈던 형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아내와 자식들을 발견한 시커멓게 그을린 군인.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완벽한 질서 속에서, 프랑스 경비병들을 할 일 없게 만든 타고난 규율 본능 속에서 이뤄졌다. _p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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