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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형일 Mar 13. 2022

나의 아저씨 작품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22.03.05 백광

박해영 (2022, 3월). 나의 아저씨 : 인생드라마 작품집 시리즈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무삭제 대본집. 종영 후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회자되며 누군가의 인생에 크고 작은 의미들을 남긴 이 드라마는 영상뿐 아니라 대본 역시 견고히 세워진 건물처럼 내력의 단단함을 글로써 증명하고 있다. 이야기 속 공기마저 살아 있는 것처럼 세밀히 쓰인 지문과 대사는 이 대본이 인간의 삶과 가장 가깝고도 자연스러운 것들을 모아 얼마나 좋은 글을 쌓아 올렸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드라마 대본은 소설처럼 인물의 속내를 다 묘사할 수 없고, 오로지 영상으로 표현 가능한 대사와 행동 등으로만 담아내야 하는 글이다. 그런데도 '나의 아저씨' 대본은 말수 없는 주인공들의 마음을 소설처럼, 영상처럼 오롯이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깊게 쓰여 있다.


1화 - S#34
기훈 난 이상하게 옛날부터 작은형이 젤루 불쌍하더라. (…)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항상 양심 쪽으로 확 기울어 사는 인간. 젤루 불쌍해.
3화 - S#78
동훈 내가 유혹에 강한 인간이라서 여태 사고 안 친 거 같애? …유혹이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모르는 거야. 내가 유혹에 강한 인간인지 아닌지.
4화 - S#10
지안 나만큼 지겨워 보이길래. 어떻게 하면 월 오륙백을 벌어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 있을까… 대학 후배아래서, 그 후배가 자기 자르려고 한다는 것도 뻔히 알면서 모른 척….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 꾸역…. (밖을 둘러보며) 여기서 제일 지겹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
4화 - S#41
동훈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 걔의 지난 날들을 알기가, 겁난다.
5화 - S#38
봉애 (수화) 아까 그 사람 누구야?
지안 (수화) …회사 사람. 봉애 (수화) 좋은 사람이지?
지안 …
봉애 (수화) 좋은 사람 같애. 
지안 (차가운 얼굴로, 수화) 잘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 되기 쉬워.
6화 - S#60
동훈 누가 욕하는 거 들으면 그 사람한테 전달하지 마. 그냥 모른 척해. 니들 사이에선 다 말해주는 게 우정인지 몰라도, 어른들 사이에선 안 그래. 모른 척해주는 게 의리고, 예의야. 괜히 말해주고 그러면… 그 사람이 널 피해. 내가 상처받은 거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 아무도 모르면 돼…...  
6화 - S#77
유라 빨리 AI 시대가 왔으면 좋겠어요. 연기도 AI가 제일 잘하고… 공부도 AI가 제일 잘하고… 변호사, 판사, 의사도 다 AI가 잘하고…. 인간이 잘난 척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세상이 오면… 잘난 척할필요도 없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7화 - S#49
유라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저는 그랬던 거 같애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잠잠해지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였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8화 - S#5
동훈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 다들 평생을 뭘 가져보겠다고 고생고생하면서… ‘나는 어떤 인간이다’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데… 뭘 갖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원하는 걸 갖는다고 해도…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디고… 무너지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그냥… 다… 아닌 것 같다고…


김지수, 이어령 (2021, 10, 27).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이 시대의 대표지성 이어령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오랜 암 투병으로 죽음을 옆에 둔 스승은 사랑, 용서, 종교, 과학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우리에게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전달한다. 1년에 걸쳐 진행된 열여섯 번의 인터뷰에서 스승은 독자들에게 자신이 새로 사귄 ‘죽음’이란 벗을 소개하며, ‘삶 속의 죽음’ 혹은 ‘죽음 곁의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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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에 까마귀는 있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지만, 우리는 까마귀를 볼 수도 없고 그 울음소리를 듣지도 못해.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 탄생, 만남, 이별, 죽음…… 이런 것들, 만약 우리가 귀 기울여서 한밤의 까마귀 소리를 듣는다면,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을 느끼는 거라네._p. 86.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모르는 거야. 안다고 착각할 뿐. 내가 어머니를 아무리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엷은 막이 있어. 절대로 어머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없어. 목숨보다 더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의 고통은 별개라네. 존재와 존재 사이에 쳐진 엷은 막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선을 떨지. ‘내가 너일 수 있는 것’처럼._p.120.  


“죽기 직전, 눈앞에는 인생이 파노라마 필름처럼 펼쳐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아닐세.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_pp.155~156.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_p.291.


랜조 미키히코(2022,2,14). 백광. 양윤옥(역). 모모.

세상이 전부 녹아내릴 듯 뜨겁던 여름날. 어느 가정집 안마당에서 네 살 난 여자아이의 시체가 발견된다. 사망 추정 시간에 호텔에서 불륜을 즐긴 엄마, 아내의 불륜 사실을 폭로하려던 아빠, 치과에 예약 진료를 받으러 간 이모, 아이를 데리고 집을 지키던 할아버지, 잠깐 집에 들렀던 이모부, 황급히 집을 뛰쳐나갔던 낯선 남자까지…. 

여아의 시체를 둘러싸고 평범한 일가족이 각자 감추어오던 충격적인 진실을 고백하며 서로를 살인범으로 지목한다. 한 명, 한 명이 고백할 때마다 범인이 바뀌고 사건이 뒤집히는 믿기 어려운 반전의 연속.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 걸까? 또 여자아이를 죽인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백광』은 ‘평범’과 ‘평온’, ‘보통’과 ‘상식’이 얼마나 쉽게 깨지기 쉬운 연약한 가면인지를 들추어낸다는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자를 충동질하는 몸, 제 몸이 명령하는 대로 살아가는 뜨겁고 유연한 액체 유리”(p.225)로 묘사되는 주인공 유키코는 도덕 혹은 윤리에 비해 욕망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상기시킨다. 또한 살갗을 휘감는 한여름의 무더위, 남태평양 섬의 원색적 화려함, 어둡고 끈적거리는 듯한 집안 분위기를 뒤엉키듯 교차시키면서 보통 사람들이 평온해 보이는 일상 아래에 숨겨두고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위태롭고 어두운 욕망과 그로 인해 일그러진 내면을 감각적인 은유로 전달한다고 하는데...

작가 렌조 미키히코는 탁월한  ‘장르적 재미’와 ‘문학적 예술성’으로 동시대 작가들에게는 경외에 찬 질시를 받은 천재 작가라고 한다. 주요 작품 《변도, 둘이서 한옷 입기》, 《회귀천 정사》, 《달맞이꽃 야정》, 《연문》, 《숨은 국화》 등.  2013년 타계했다. 


만세 소리와 아내의 미소로 배웅을 받으며 죽음의 길을 떠났던 전쟁 통의 그날 밤, 그리고 천신만고의 항해 끝에 도착한 남태평양의 섬, 허연 불꽃처럼 작열하는 태양 빛이 내리쬐는, 새파란 바다에 둥실 떠오른 듯한 원색의 섬. 그 두 가지는 몇 번을 떠올려도 처음과 똑같이 선명하게 내 머리와 몸을 온통 점령한다. _pp. 14~15.
여태껏 이 집에 똬리를 틀고 있던 뭔가가 시어머니 돌아가신 뒤에 조금씩 조금씩 겉으로 스며 나온 끝에 결국 한 소녀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터져 나온 것이다. 아니, 이번 사건으로 모두 다 토해낸 게 아니다. 이 집이 검은 비닐 봉투에 폭 싸서 감춰둔 쓰레기는 그 사건으로도 미처 다 토해내지 못한 채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여름 늦더위에 썩어 문드러져 마침내 불쾌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_p. 81.
나오코의 머리카락이 틀림없다. 유키코 자신의 머리카락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역시 히라타는 그날 나오코와 어떤 식으로든 만났었다…. 하지만 그래도 히라타는 범인이 아니다. 진짜 범인은 바로 나다. 나는 그날 호텔방에서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 그 집 정원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조리 보고 있었다. 능소화나무 뒤편에서 이 그림책의 늑대와 똑같은 표정으로. ---pp.139~140
자꾸 꽃 넝쿨로 목을 매려다가 나동그라져 죽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올리는 노인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나오코의 죽음까지 그리 슬픈 사건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지난 이 년 동안 노인의 괴상한 말과 행동을 혼자 감당하면서 사토코는 신경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도무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피로감을 느껴왔지만 왠지 이 순간, 사토코는 처음으로 이 노인네는 미친 게 아니라고 느껴졌다. 오히려 이 노인네만 정상이고, 미친 건 우리 쪽이다. 나를 포함해 죽음을 잔혹하고 슬픈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미친 것이다…. p.186
성인이 되면서 유키코는 언니에게 이길 수 있는 것을 딱 한 가지 갖게 되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자를 충동질하는 몸…. 그녀를 유리라고 한다면 아직 녹아 있는 상태의 뜨겁고 유연한 액체 유리였다. 남자를 갖고 놀듯이 마음껏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꾸는 몸. 그 몸을 무기로 유키코는 언니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했다. --- p.225
“죽여도 좋아”라고 여자는 말한다. “괜찮아, 당신 역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이 아이 역시 고통에서 해방될 테니까. 이 아이는 천사처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당신과 또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그 작은 몸으로 미처 다 받아내지 못해 울먹거리고 있어. 그러니까 이 아이도 편해지는 거야…. 모두를 위해서야. 그러니까 괜찮아.” --- p.284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기사가 있다.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2019년 10월 19일 기사.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묵직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며, 뭉클하기도 하다. 

힘들 때마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마다, 앞이 깜깜할 때마다 찾아보고 싶은 목소리. 

여기에 덤으로 쟁겨놓는다. 

그리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시길.... 


-건강해 보이십니다.

"나같은 환자들은 하루에도 듣는 코멘트가 여러 가지야. "수척해 보여요." "건강해지셨네." 시시각각 변하거든. 알고 보면 가까운 사람도 사실 남에겐 관심이 없어요. 허허. 왜 머리 깎고 수염 기르면 사람들이 놀랄 것 같지? 웬걸. 몰라요. 남은 내 생각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남이 어떻게 볼까?' 그 기준으로 자기 가치를 연기하고 사니 허망한 거지. 허허."


-혼자 기다리며 녹색 벽에서 선생께서 젊은 시절에 신문에 쓰신 ‘모리악의 기침 소리'를 보았습니다.

"(미소지으며)내가 프랑스에서 모리악 선생을 만나고 쓴 거지. 여기엔 없지만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의 추억도 있어요. 그때 그분이 여든이 좀 넘었을 때야. 생각해보면 지금 나보다 젊었는데 아파트 계단을 못 올라가셨어요. 내가 등에 업히라고 했더니 화를 내요. 나는 시체가 아니라고(웃음). 서양 문화는 부축은 받아도, 업히는 건 수치로 여겨요. 한국은 다르지. 상호성이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봐도 처음 만난 아들과 아버지가 업고 업혀서 냇물을 건너잖아. 사위가 장모를 업고 사장이 사원을 업어줘요. 다들 어릴 적 엄마 등에 업힌 기억이 있거든."


-업어준다는 건 존재의 무게를 다 받아준다는 건데… 서양인에겐 익숙지 않은 경험이군요.

"그들은 아이를 요람에서 키우니까. 태어나자마자 존재를 분리하지요. 땅에 놓으면 쥐들이 공격해서 아이를 천장에 매달아 두기도 했어요. 우리나라는 무조건 포대기로 싸서 둘러업잖아. 어미 등에 붙어 커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성이 착해요(웃음). 서양은 분리가 트라우마가 돼서 독립적인 만큼 공격적이거든. 한국의 전통 육아는 얼마나 슬기로워요. 오줌똥도 쉬쉬~, 끙아끙아~ 하면서 어린애 말로 다 유도를 했거든."


-요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번 뵐 때 ‘마지막 파는 우물은 죽음’이라고 하셨는데요

"죽음을 앞두면 죽는 얘기를 써야잖아? 나는 반대를 써요. 왜냐? 죽음은 체험할 수가 없으니까. 사형수도 예외가 없어요. 죽음 근처까지만 가지. 죽음을 모르니 말한 사람이 없어요. 임사체험도 살아 돌아온 얘기죠. 살아 있으면 죽음이 아니거든. 가령 이런 거예요. 어느 날 물고기가 물었어. "엄마, 바다라고 하는 건 뭐야?" "글쎄, 바다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걸 본 물고기들은 모두 사라졌다는구나."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어요. 그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보지요. 내가 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상태, 그게 죽음이에요.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가를 전해줄 수는 없는 거라. 그래서 나는 다른 데서 힌트를 찾았어요."


-어디서 힌트를 찾으셨나요?

"죽을 때 뭐라고 해요? 돌아가신다고 하죠. 그 말이 기가 막혀요.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면 결국 죽음의 장소는 탄생의 그곳이라는 거죠. 생명의 출발점. 다행인 건 어떻게 태어나는가는 죽음과 달리 관찰이 가능해요.

2~3억 마리의 정자의 레이스를 통해서 내가 왔어요. 수능 시험보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거지(웃음). 그런데 그 전에 엄마와 아빠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그 전의 조부모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계속 거슬러 가면 36억 년 전 진핵 세포가 생겼던 순간까지 가요. 나는 그렇게 탄생을 파고들어요."


-죽음을 느끼면서 태어남 이전을 복기한다? 엄청난 속도의 플래시백인데요. 뇌에서 빅뱅이 일어났겠습니다.

"허허. 그렇지요. 모험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 있어요. 진화론자의 의견에 비추어보면 내 존재는 36억 년 원시의 바닷가에서 시작됐어요. 어찌 보면 과학은 환상적인 시야. 내가 과거 물고기였을까, 양수가 바닷물의 성분과 비슷하니 그럴지도 모르겠다...태아 형성 과정을 보면 아가미도 물갈퀴 자국도 선명하게 보이거든. 그렇게 계산하면 내 나이는 사실 36억 플러스 여든일곱 살이야. 엄청난 시간을 산 거죠. 죽음에 가까이 가고서 나는 깨달았어요.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선생은 오래전에 이미 ‘디지로그가 온다'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예언하셨어요. 미지의 죽음을 탄생의 신비로 푸니, 이번엔 또 뭐가 보이던가요?

"난 옛날부터 참 궁금했어요. 왜 외갓집에만 가면 가슴이 뛸까? 왜 외갓집 감나무는 열린 감조차 더 달고 시원할까(웃음)? 그게 미토콘드리아는 외가의 혈통으로만 이어져서 그래요. 거슬러 가면 저 멀리 아프리카의 어깨 벌어진 외할머니한테서 내가 왔는지도 몰라. 허허. 이렇게 한발 한발 가면서 느껴지는 게 신의 존재예요. 최초의 빅뱅은 천지창조였구나…"


-그런데 요즘엔 탄생 자체를 비극으로 보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내 의지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서 안 태어나는 게 행복했다, 어쩔 수 없이 태어났으니 빨리 사라지는 게 낫겠다, 이렇게 반출생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건 무의미해. 제일 쉬운 게 부정이에요. 긍정이 어렵죠.나야말로 젊을 때 저항의 문학이다, 우상의 파괴다, 해서 부수고 무너뜨리는 데 힘을 썼어요. 그런데 지금 죽음 앞에서 생명을 생각하고 텅 빈 우주를 관찰하면, 다 부정해도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어요. 숨을 쉬고 구름을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철학자 김형석 선생은 인격의 핵심은 성실성이라고 했지요. 선생은 인격의 핵심을 뭐라고 보십니까?

"하하. 핵심은 인격과 신격은 다르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흉내 내기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려고 했던 괴테가 그 인간다움으로 구제를 받았어요. 나는 유다가 베드로보다 예수님을 더 잘 이해했을 거라고 봐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유다는 교회가 아니라 피의 밭을 남겼어요. 그런데 인간의 인격은 유다에 가까워서 더욱 신격을 욕망해요. 그래서 고통스럽죠. 내 마음의 빅뱅을 그 누가 알겠어요? 각자의 마음은, 두뇌는 지구에서 하나예요. 기술로 찍어낸 벽돌이 아니거든. 내 몸의 지문도 마음의 지문도 세상에 하나뿐이지. 하나님의 유일한 도장이야. 내 마음의 지문에는 신의 지문이 남아있어요."


-요즘 들어 신에 대해 더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에 대해 말할 지식도 자격도 없는 자들이지요.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베드로나 유다나 똑같아. 베드로도 유다처럼 닭이 울기 전 세 번 예수님을 부정했잖아. 오래 관찰하면 알아요. 신은 생명을 평등하게 만들었어요. 능력과 환경이 같아서 평등한 게 아니야. 다 다르고 유일하다는 게 평등이지요.햇빛만 받아 울창한 나무든 그늘 속에서 야윈 나무든 다 제 몫의 임무가 있는 유일한 생명이에요. 그 유니크함이 놀라운 평등이지요. 또 하나. 살아있는 것은 공평하게 다 죽잖아."


-평생 어떤 꿈을 꾸셨습니까?

"동양에선 덧없는 것을 꿈(夢)이라 하고 서양은 판타지를 꿈(dream)이라 하죠. 나는 평생 빨리 깨고 싶은 악몽을 꿨어요.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빠져 외길을 걷는 꿈, 어릴 때 복도에서 신발을 잃고 울던 꿈, 맨발로 갈 수 없던 공포, 뛰려면 발은 안 떨어지고, 도망가보면 아무도 없는 험한 산길이었지요. 자기 삶의 어두운 면이 비치는 게 꿈이에요. 깨면 식은땀을 흘리고 다행이다 했어요. 현실에서 눈뜨고 꾸는 내 꿈은 오직 하나였어요. 문학적 상상력, 미지를 향한 호기심…"


-요즘엔 어떤 꿈을 꾸십니까?

"빅뱅처럼 모든 게 폭발하는 그런 꿈을 꿔요. 너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어둠. 혹은 터널 끝에 보이는 점 같은 빛. 그러나 역시 8할은 악몽이에요. 죽음이 내 곁에 누워있다 간 느낌... 시계를 보면 4시 44분 44초일 때도 있어요(웃음). 동트기 전에, 밤도 아니고 새벽도 아닌 시간이죠. 그 시간이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에요. 섬뜩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혼자라는 거였어요. 누구도 그 길에 동행하지 못하니까요. 다행히 그때 또 새롭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요. 젊은 날 인식이 팽팽할 땐 몰랐던 것."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87년간 행복한 선물을 참 많이 받으셨지요?

"그랬죠. 산소도, 바다도, 별도, 꽃도… 공짜로 받아 큰 부를 누렸지요. 요즘엔 생일케이크가 왜 그리 그리 예뻐 보이는지 몰라. 그걸 사 가는 사람은 다 아름답게 보여(웃음). "초 열 개 주세요." "좋은 거로 주세요." 그 순간이 얼마나 고귀해. 내가 말하는 생명 자본도 어려운 게 아니에요. 자기가 먹을 빵을 생일 케이크로 바꿔주는 거죠. 생일 케이크가 그렇잖아. 내가 사주면 또 남이 사주거든. 그게 기프트지. 그러려면 공감이 중요해요. 공의가 아니라, 공감이 먼저예요."


-공의보다 공감이라는 말이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상품 경제 시대에서 멀리 왔어요. AI시대엔 생산량이 이미 오버야. 물질이 자본이던 시대는 물 건너갔어요. 공감이 가장 큰 자본이지요. BTS를 보러 왜 서양인들이 텐트 치고 노숙을 하겠어요? 아름다운 소리를 좇아온 거죠. 그게 물건 장사한 건가? 마음 장사한 거예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즐거움, 공감이 사람을 불러모은 거지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는지요?

"딱 한 가지야.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미래를 낙관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이 시대가 좋든 싫든, 한국인은 지금 대단히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고 있지요. 만조라고 할까요. 그런데 역사는 썰물과 밀물을 반복해요. 세계는 지금 전부 썰물 때지만, 썰물이라고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갯벌이 생기니까요."


-요즘 따님 생각을 더 많이 하시겠습니다. 암 선고받은 후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더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는 까닭도 따님과 관련이 있는지요?

"(미소지으며)우습지만 성경에는 나중 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이 있어요. 내 딸이 그랬어요. 그 애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지 않았어요. "지금 나가면 3개월, 치료받으면 6개월" 선고를 듣고도 태연하니까, 도리어 의사가 놀라서 김이 빠졌어요.

민아가 4살 때였어요. 아내가 임신해서 내가 아이를 데리고 대천해수욕장 앞 해변 바라크 건물에 묵은 적이 있어요. 아이를 재우고 다른 천막에 가서 문학청년들과 신나게 떠들었지. 그때 민아가 자다 깨서 컴컴한 바다에 나가 울면서 아빠를 찾은 거야. 어린 애가 겁에 질려서...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우리 애는 기억도 안 난다지만(웃음). 그랬던 아이가 혼자 미국에 가서 무척 고생을 했어요.

그 어렵다는 법대를 조기 졸업하고 외롭게 애 키울 때, 그날 그 바닷가에서처럼 "아버지!"하고 목이 쉬도록 울 때, 그때 나의 대역을 누군가 해줬어요. 그분이 하나님이야. 내가 못 해준 걸 신이 해줬으니 내가 갚아야겠다. 이혼하고도 편지 한 장 안 쓰던 쿨한 애가, "아빠가 예수님 믿는 게 소원"이라면 내가 믿어볼 만 하겠다, 그렇게 시작했어요. 딸이 실명의 위기에서 눈을 떴을 때 내 눈도 함께 밝아진 거지. 딸이 아버지를 따라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딸의 뒤를 좇고 있어요(웃음)."


-언제 신의 은총을 느낍니까?

"아프다가도 아주 건강하게 느껴지는 아침이 있어요. 내 딸도 그랬죠. "아빠, 나 다 나았어요"라고. 우리 애는 죽기 전에 정말 충만한 시간을 보냈어요. 1년간 한국에서 내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죠. 암에 걸리고 큰 선물을 받았어요. 죽음에 맞서지 않고 행복하게 시간을 썼어요. 망막 수술도 성공해서 밝은 세상도 봤지요.

내가 보내준 밸런타인데이 꽃다발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호텔 방에서 "아빠, 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라며 전화가 왔어요. 육체가 소멸하기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했고, 기도 드리고 쓰러져서 5~6시간 있다가 운명했어요.

어떤 환자라도 그런 순간이 와요. 촛불이 꺼질 때 한번 환하게 타오르듯이. 신은 전능하지만, 병을 완치해주거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게 해주진 않아요. 다만 하나님도 인간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면 가엾게 여겨 잠시 그 자비로운 손으로 만져줄 때가 있어요. 배 아플 때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만져주면 반짝 낫는 것 같잖아. 그리고 이따금 차가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지요. 그때 나는 신께 기도해요."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옛날엔 나는 약하니 욥 같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지금은…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는 안 해요. 역사적으로도 부활의 기적은 오로지 예수 한 분뿐이니까. 나의 기도는 이것이에요. "어느 날 문득 눈뜨지 않게 해주소서." 내가 갈피를 넘기던 책, 내가 쓰던 차가운 컴퓨터… 그 일상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싶어요."


-저는 나이 들면 과거를 반복해서 사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지성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선생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지혜의 전성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소지으며)창을 열면 차가워진 산소가 내 폐 속 깊숙이 들어와요. 이 한 호흡 속에 얼마나 큰 은총이 있는지 나는 느낍니다.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에요.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에요. 죽음의 형상이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로 올지, 온갖 튜브를 휘감은 침상의 환자로 올지 나는 몰라요.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침대에서 깨어 눈 맞추던 식구, 정원에 울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보내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끝이란 없어요. 이어서 또 다른 영화를 트는 극장이 있을 뿐이지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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