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29. 천선란, 안녕달, 에르베 르 텔리에
천선란 (22.6.22). 노랜드. 한겨레출판사
작가의 말이 인상적인 노랜드. "행복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읽고 나면 지치는 책이 될까 봐 두렵다.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두 번째 소설집을 이렇게 엮어 당신께 보낸다."
소설집의 제목과 카피도 인상적인 노랜드.
“싸우는 게 아니라 지킨 거야”, 〈흰 밤과 푸른 달〉
“우리가 두 번 다시 어떤 것도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키타〉
‘가끔은 진실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니까’, 〈푸른 점〉
“사람은 다른데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옥수수밭과 형〉
“여전히 모르겠다. 그래도 되는지. 그 애의 계획을 내가 망쳐도 되는지”, 〈제, 재〉
“왜 어떤 사람은 태어난 것조차 잊혀질까”, 〈이름 없는 몸〉
“다음 생에는 네 이름을 절대 잊지 말거라”, 〈-에게〉
“우주는 공(空)이다. 존재에는 실재가 없다.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에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우주를 날아가는 새〉
“제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두 세계〉
‘모두가 적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우리처럼’,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대장님, 우리는 앞으로 제2의 지구에서 새 문명을 꾸려야 합니다. ... 우리가 누렸던 과학과 기술을 재현하려면 배양통에 있는 인간이 자라고, 배우고, 아이를 낳고, 세대를 몇천 년간 넘겨야 가능하겠지요. 저는 벌써 고민입니다. 우리가 살았던 첫 번째 지구에 대한 기록을 남길 것인지에 관해. 그래도 대장님, 저는 인간이 바키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두 번 다시 어떤 것도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_79쪽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_161쪽
운전을 할 수 없었던 나이였던 우리는 고라니를 치고 가는 운전자의 마음을 농담 따 먹기 하듯 추측할 뿐이었다. 보지 못했을 거야. 놀랐겠지. 하지만 그중에는 분명 기분 더럽다며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을 거야. 놀라 벌벌 떠는 사람도 있었을 거고.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겠지. 친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설마. 그런 사람이 진짜 있을까? 있지 않을까. 그럼 미안해서 우는 사람도 있었을까? 모르겠다. 근데 있었으면 좋겠다. 한 명쯤은. _196~197쪽
엄마는 시집오기 전에 번호로 불렸대. 예비 신부 몇 번. 인터넷에 그렇게 이름이 올라가는 거야. 엄마는 327번. 예뻐서 조회수가 가장 높았대. 그러다 아빠가 가장 값을 높게 불러서 온 거야. 그 후에는 한국식에 맞춰 개명을 했지만 그 이름조차 안 불렀어. 혼을 뺏으려고. 혼? 응. 이름을 잊게 해서 정체성을 흐리게 만드는 거야.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내가 누군지 잊게 된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거야. 뭔지 모르는 것에게. 그럼 이름 없는 몸이 돼. _219쪽
나 있잖아. 가끔씩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데 너무 생생해.무섭게 왜 그래. 진짜로. 너무 화가 나서 숨을 크게 내뱉고 있을 때 가끔 누가 말을 걸어. 뭐라고 말을 거는데? 죽이고 싶으냐고. 죽여줄까? 하고. 그럼 너는 뭐라고 그래? 나는. ……. 응, 이라 말해. _260쪽
나는 가장 잊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모든 것을 조금씩 잊어가는 중이었다. 해가 지날수록 너는 더 빛바래질 것이다. 너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잊고, 네 목소리를 잊고, 네 얼굴을 잊고, 그렇게 끝내 네 이름을 잊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내가 아니면 너를 누가 기억해주지? 태어났지만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죽으면 그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왜 어떤 사람은 태어난 것조차 잊혀질까. 그게 왜 너여야 했을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너를 살릴 수 있었던 수억 개의 가능성이 매일 밤마다 소리 없이 파묻혔다. _236쪽
내가 뭐라고 했더라. 그래. 가만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럼 우리는 중력이 없는 곳에 가서 살자고 말했다. 묶여 있지 않으면 어디든 행복할 거야. 네 방 천장에는 아직도 야광 별 스티커가 붙어 있다. 여전히 빛날까. 밤이 되어야 알 수 있을 텐데, 아직도 해가 지고 있다. 조금씩 노을빛이 네 방 창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토록 느리게 저무는 태양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_256쪽
너는 쓸쓸하고, 서글프고, 외롭고, 억울하게 걸어가는 길에 누구를 만난 거니. _258쪽
혹시 인공지능이 밖으로 나올 수도 있을까요? 그러니까 밖이라 함은……. 이 세상으로요. 우리가 사는 세계. _331쪽
빛이 보여서 왔어. 어두운 새벽에 깜빡이는 빛이 보여서 왔다. 생명은 빛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 그 빛이 시초니까. 이 우주의. 그리고 죽지. 생명은 누구나. 하지만 죽음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어. 죽는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 저 너머에는 뭐가 있어? 검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그곳에 무엇이 있더라. 매몰됐던 기억은 또다시 차츰차츰 조각을 맞춰갔다. 짙은 보랏빛의 하늘, 그리고 그 하늘에서 보았던 나무의 뿌리. 바스락거리는 잎사귀들의 대화.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가 있어, 저기 너머에는.” _412쪽
안녕달 (2022.06.10.). 눈, 물. 창비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가 인상적이다. "지키는 사랑은 왜 언제나 그렇게 어려운 걸까? 모든 것을 망치기만 하는 세계에서 무언가 지키려 기꺼이 베이고 찔린, 안간힘을 썼던, 잃고 또 잃어 본 사람들과 이 책을 읽고 싶다. 각자 다른 이야기로 읽는다 해도 좋을 것이다. 책의 여백에서 무엇을 건져 올리건, 쉬운 위안은 찾지 못할 듯하다. 어떤 통증은 무뎌진 상태의 우리를 깨우기 위해 필요하다. 쪽마다 아픈 이 책을 당신에게 안기고 싶은 것은 그래서이다."
● 줄거리
캄캄한 겨울밤, 한 여자가 눈아이를 낳는다. 여자가 안으면 체온 때문에 녹아버리는 눈아이. 여자는 아이를 차가운 바닥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아이의 손을 잡으면 손이 녹아버린다. 여자는 밖에서 눈덩이를 가져와 아이에게 새 손과 손가락을 만들어준다.
여자는 눈을 치마 가득 담아와 담을 쌓고 눈사람 인형을 만들어주며 눈아이를 지키지만, 계절의 변화는 막을 수 없었다. 봄이 찾아오자 눈아이의 몸은 점점 녹아간다. 절망에 빠진 여자 앞에 도시에서 온 전단지가 떨어진다. ‘언제나 겨울’이라는 상품을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는 광고다. 여자는 광고지로 아이가 있는 방의 문틈을 틀어막고 도시로 달려간다. 여자의 방에서 도시로 가는 길엔 도시에서 나온 온갖 쓰레기가 버려지는 쓰레기장이 있다. 거대한 성벽과 같은 도시의 외부엔 이 도시의 쾌적함을 위해 돌아가는 에어컨 실외기가 굴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총천연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와 여자가 속한 단순한 무채색 공간의 대비는 극명하다.
여자는 맨발로 도시를 달린다. 건물 벽면엔 ‘모두 가질 수 있어요’라고 적혀 있지만 여자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없다. 여자는 간신히 상점 앞에 도착하지만 이미 무료체험 이벤트가 끝난 뒤다. ‘언제나 겨울’은 여자에게 너무 비싸다. 가진 것 없는 외지인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도시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신분증 불필요’인 일을 구한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에서 우유를 배달하고, 비행기나 에어컨 탈을 쓰고 전단지를 돌린다. 건물마다 돌아다니며 화장실을 청소한다. 여자의 노동은 철저히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모두가 '낙원' '행복' '편리함' '속도'를 외치는 도시에서 여자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 유령이자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여자는 결국 눈아이를 지켜 낼 수 있을까?
에르베 르 텔리에 (22.5.26). 아노말리. 이세진(역). 민음사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동일한 승객들을 태운 동일한 비행기가 두 번 착륙했다고요?”
소설 <아노말리>는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가 두번 착륙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세달 전에 안전히 비행을 마친 파리발 뉴욕행 비행기와 똑같은 비행기가 동일한 승객을 싣고 다시 착륙 요청을 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과학자, 종교인, 정치인들을 소집해 미스터리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뜻밖의 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는 다양한 캐릭터의 이야기를 오가면서 자신의 자아와 대면할 때 인간의 반응을 탐구한다.
「아노말리」 는 ‘이상’ ‘변칙’이라는 의미. “당신은 상상할 수 있어? 당신이 둘이라는 걸?” 소설 속 이 대사가 작품의 주제를 보여준다. 소설은 뉴욕에서 파리로 비행기를 타고 온 인물들이 3개월 후 똑같은 여객기를 타고 온 자기의 분신과 만난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SF 장르가 흔히 구사하는 사고실험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3월과 6월의 인물로 나뉘어 3개월 간의 시간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이후 각자의 삶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지켜보게 된다. 겉으로는 성실한 가장이지만 실제로는 청부 살인 업자인 블레이크, 시한부를 선고받은 비행기 기장 데이비드 마클, 동성애자임을 숨긴 채 활동하는 나이지리아 뮤지션 슬림보이, 한때 사랑했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한 앙드레와 뤼시, 엄마에게도 말못한 비밀을 가진 어린 소녀 소피아와 엄마인 에이프릴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진다. 각 인물들간 관계들의 양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몰입하게 한다. 작가가 각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데 서로 다른 문체를 사용하는 형식실험을 시도했기에,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이 되고,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미스터리가 되며, SF 와 철학을 넘나들기도 하는 단편들이 모인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아노말리」 는 등장인물들 중 하나인 소설가 빅토르 미젤이 쓴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문학적 장치 또한 재미있다.
그는 매혹 반 두려움 반으로 또 한 명의 앙드레를 바라본다. 그의 주름살, 우윳빛 섞인 사파이어 같은 회색 눈, 여윈 뺨과 그 언저리에서 시작되는 하얀 턱수염 그리고 듬성듬성한 머리를. 앙드레는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며 면도를 하지만, 그와 거울 속 그는 서로 길들이기에 이르렀다. 이곳의 카메라는 강직하다. 고해상도의 화질은 무자비하고, 카메라 앵글은 예의고 뭐고 차리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늙은 사내다. 닳고 닳은, 매력 없고 지친 사내. 때때로 구현된다고 생각해 온 변치 않는 젊음의 인장(印章)을 그 얼굴에서 찾아보지만 그런 건 보이지 않는다. 노년이 오욕의 굴레처럼 구석구석을 차지했다. 그는 퉁퉁 붓고 살찐 자신을 발견한다. 다이어트를 해야겠다. 정말이지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롤링스톤스에 열광했는데 비틀스가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322쪽)
폴이 슬프게 미소 짓는다. 의학과 치료 방법에 대한 믿음이 그 자신에 대한 믿음보다 강하다. ... 그것이 그가 제정신으로는 못 할 이 직업을 선택하고 잘 해내는 이유다. 실은 이 직업이 자기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폴은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정말 잘 속이기 때문에 환자들을 능숙하게 안심시킬 수 있다. 하지만 또다시 숨이 잘 안 쉬어진다. 한 남자가 옆에서 죽어 가고, 그 남자는 그의 동생 데이비드다.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하다. (357쪽)
일단 비현실적인 기분이 오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 존재 여부가 의심스러우면 볼을 꼬집어 보는 걸로 충분하죠. 그리고 또 하나의 나는 내 비위를 맞춰 주지 않는 거울 같지만 내 비밀까지 다 아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죠. 그렇게 노출이 되면 나는 변화 혹은 도피를 결심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삶에 둘이 있으면 하나는 없어도 된다는 뜻이죠. 틀림없이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아, 다 허무하구나, 아파트, 직장, 물질적인 것 전부가.... 내면의 알맹이,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 것에 집중하겠지요. (435~436쪽)
우리의 시간이 착각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한 세기도 거대한 컴퓨터 프로세서에게는 찰나에 불과할까요? 그러면 죽음은 뭐죠? 그냥 한 줄 코드상의 '엔드(end)'? (2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