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경유지에서 :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by 오윤

유럽을 갈 때면 대개 러시아 항공 에어로플로트를 이용한다. 일단 가격이 저렴하다. 모스크바는 유럽으로 가는데 중간 휴게소로 제격이기도 하다. 좁디좁은 이코노미석을 타고 맛없는 기내식을 먹고 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적정 시간이 내겐 8시간 정도다. 8시간이면 밥을 두 번 먹고, 그 사이에 영화 두 편 정도를 보면 된다. 이 즈음되면 기내식이 위를 한번 돌아 대장을 지나 소장으로 내려갈 시간이고, 지겨움과 뻐근함에 온 몸의 근육들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때 즈음 기내 방송이 시작된다.

“곧 비행기는 모스크바 국제 공항에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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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여행은 새로운 생각의 산파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내가 한 생각이 아니고, 어디선가 주서 들은 이야기다. 생각의 산파는 무슨. 생각을 하려면 그냥 집에서 방문 잠그고 하면 된다. 움직이는 비행기 안에서 고상하게 생각이란 걸 한다는 것은 낭만적인 헛소리다.


눈앞에 보이는 구름, 엔진소리, 아이의 울음소리, 비행기 날개, 저 멀리 보이는 파란 하늘, 초원, 낯선 빌딩, 못다 본 영화, 외부에서 들어오는 신호는 많고, 우리는 그걸 흘려보내기도 벅찰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오는 신호 중 어떤 사물은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그 이물감 중 어떤 것은 멈추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작은 노트를 핀다. 공간, 시간, 그리고 느낌을 적어 놓는다. 이 느낌을 언젠가 다시 펼쳐볼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나는 여행을 할 때면 자주 작은 노트를 만지작 거리곤 한다. 왜 쓰는가? 어쩌면 그게 지금 이 순간, 모스크바 국제 공항에 도착한 이 순간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다.


모스크바에서 리스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린다. 32번 게이트. 알랭드보통은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공항의 매력에 대해 이런 썰을 깐 적이 있다.


“공항의 매력이 집중된 곳은 터미널 천장에 줄줄이 매달려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텔레비전 화면들이다. 미적 자의식이 전혀 없는 그 모습, 노동자 같은 상자와 보행자 같은 활자는 아무런 위장 없이 자신의 감정적 긴장 상태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을 드러낸다. ... 화면들의 계속되는 호출, 가끔 커서의 초조한 박동을 수반하기도 하는 호출은 언뜻 단단하게 굳어버린 듯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냥 복도를 따라 내려가 비행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우리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장소,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르는 장소에 착륙할 것이다. 오후 3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여오는 시간에 늘 어딘가로. 보들레르가 말하는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Alain de Botton, 2004/2011, p. 59)."


공항은 자주 이곳에 머물고자 하는 인간에게 속삭인다.

"떠나는 것, 어렵지 않아요."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수많은 깜박거림, 호출신호, 사람들은 그 신호에 맞추어 사뿐사뿐 움직이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돼지 문양으로 치장한 커플. 파란, 노란, 빨강 목베게를 하고 사이좋게 무지개처럼 지나가는 친구들. 게이트가 바뀌었는지 부지런히 오른쪽, 왼쪽으로 뛰어가는 백발의 두 남자. 손을 잡고 이어달리기를 하는 듯 달려가는 가족. 절뚝절뚝 다리를 절며 천천히 부지런히 걸어가는 노부부의 꽉 잡은 손.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휠체어를 미는 할아버지의 미소.


경유지에서 수많은 낯선 인종, 세대, 취향을 만나게 된다. 이들의 발걸음을 관찰하다보면 고요와 평화가 찾아온다. 삶의 현장에는 적과 동료가 있고, 곳곳에 슬픔, 욕망, 비애, 분노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경유지에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마주하다 보면 일상의 현장에서 마주한 그런 감정들이 모두 잠시 왔다 사라져가는 점 같은 자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의 고요가 찾아온다.


그 고요가 좀 더 강력하게 기억되는 것은 모스크바의 보안 검색 시스템도 한몫 했다. 환승 공항에 내리면 자동반사적으로 환승 표지판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러다보면 보안 검색 구간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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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여름 모스크바에서 마주한 보안검색 구간의 풍경.


맙소사. 마치 6.25전쟁 시절 흥남부두를 떠올리게 했다. 피난민이 된 심정이었다. 물론 과장이다. 다만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출발한 수많은 비행기가 오가고,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이곳을 지나야만 하는 사람들, 보안 검색 구간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보안대를 지키는 사람 수는 과도하게 적었다. 모두 보드카를 먹고 뻗었는지, 얼굴 뻘건 두 명의 보안검색 용사가 수 백 명의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확인하고, 보안검색을 하는 사람 수는 과도하게 적었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공평하게 줄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공항 어디에도 없었다.


“자 여러분 사이좋게 알아서 오세요.”


인간이 알아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배관에 찌든 때가 잔뜩 끼어 제대로 물이 내려가지 않는 세면대처럼 수도꼭지를 나온 수백 개의 물줄기들이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았다. 같은 자리를 맴돌다 보니 사람들과 부대끼게 되고, 여기저기서 눈치작전이 시작된다.


그해 여름, 미친 똘아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놈들의 공격으로 스트레스 지수에 과부하가 걸려, 피부 알러지로 고생하던 그녀가 한 마디를 던진다.

“다시 벌레들이 내 몸에서 꿈틀대기 시작해.”


가려움을 겨우겨우 침과 한약으로 달래며 비행기를 탔는데, 모스크바 공항에서 달래졌던 벌레들이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이 허술한 시스템 때문에... 숨죽인 벌레들의 공격에 대해 생각한다. 돌파해야 할 보안검색 구역에 대해 생각한다. 보안검색 요원을 향해 경쟁적으로 돌진하는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우리는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 이번 여행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질문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앞으로 전진....


............

한시간 후.


우리는 흥남부두를 탈출해 리스본행 비행기가 출발하기로 약속된 게이트 31번 아래의 한 의자 앉아있다. 보안검색대 앞에서 느낀 감정, 불안함, 짜증스러움, 조급함, 두려움 때문일까? 역설적으로 보안검색대를 통과한 후 마주한 모스크바 공항은 고요와 평화로움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화면들의 계속되는 호출, 사람들의 가벼운 발걸음. 감정도 사람도 그렇게 왔다 가는 거다. 게이트 31번에 탑승 표시가 뜬다. 이제 우리도 누구들처럼 경유지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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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Pessoa, F. (1999). The Book of Disquiet. 배수아(2014). 불안의 서. 통영: 봄날의 책.

Botton, A. (2004). The Art of Travel. 정영목(2011). 여행의 기술. 서울: 청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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