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오비두스, 우리는 모두 종말을 향해 간다.

by 오윤
내 육신의 심장은 모든 사물과 나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꺼져버린 기억에 의해 육체적으로 짓눌려 있다. (Fernando Pessoa, 1999/2014, p. 72)

오비두스, 포르투칼 레이리아 현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여기에는 사랑, 질투, 싸움, 미움, 화해, 삶이 있었다. 포르투칼어로 오비두스는 성, 요새라는 뜻이다. 성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마을은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다. 오비두스의 아침, 눈을 뜨니 호스텔 창밖으로 넓게 펼쳐진 지평선 끝에서 해가 떠오른다. 빨간 지붕, 흰색 벽, 노랑과 파랑의 포인트 색, 수없이 날아다니는 제비들, 붉어지는 하늘, 떠오르는 태양, 매혹적이다.


#12 1오비두스.jpg
#12 3오비두스.jpg
#12 7오비두스.jpg
#12 2오비두스.jpg
#12 5오비두스.jpg
#12 6오비두스.jpg


호들갑스럽지 않은 조용하고 깨끗한 예쁜 마을이다. 사람보다 제비가 100배 정도는 많이 살고 있는 것 같은 마을, 흰색의 도화지 위에 파란색, 노란색 페인트로 한 줄을 심플하게 그은 후 그 안에 진저, 고서점, 옷감, 공예, 장신구 등을 점점이 빚어낸 마을. 우연히 들어간 음식점에서 만난 종업원은 유쾌했고 호스텔 주인장은 따뜻했던 마을. 창문을 열면 로마시대부터 있었다던 성곽과 그 성곽을 중심으로 펼쳐진 삶의 전경들이 작고 하얗고 아름답게 펼쳐진 마을, 나는 지금 오비두스에 있다.


#12 4오비두스.jpg
#12 8오비두스.jpg
#12 10오비두스.jpg
#12 9오비두스.jpg


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신트라에서 기차를 잘못 탔다. 청량리역(리스보아 오리엔트 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했는데 수서역으로 가는 기차를 탄 거다. 기차가 엉뚱한 곳으로 가는 걸 알아채린 후 허둥지둥 내렸다. 우리로 치면 신도림 역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정말 많은 플랫폼이 있었다. 여기저기 플랫폼을 돌아보면서 포르투칼에 와서 처음으로 맨붕이 되었던 것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역승무원들이 최대한 도움을 주려 애를 썼지만, 도무지 어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는 지하철역으로 통하는 길을 가르쳐줬고, 누군가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을 가르쳐줬으며, 누군가는 포르투갈어로 열심히 설명하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이상하게 리스보아의 대중교통, 특히 지하철과 기차역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플랫폼은 많은데 각 플랫폼에서 떠나는 기차가 뭔지 영 알 수가 않는 거다. 안내도 거의 없었다. 이게 시스템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을 거다. 문제는 맨붕에 빠진 내가 문제였다.


그렇다! 그날 오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의 리스보아 어딘가에서, 우리로 치자면 신도림역의 플랫폼 앞에서 나는 “청량리역을 찾아가야 하는데, 거기서 춘천행 버스를 타야하는데 어쩌지?”하며 살짝 멘탈이 나갔다. 길을 잃었고, 당황했고, 그러자 오래된 습성이 나왔다.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거다. 그녀의 얼굴 위에 어릴 적 무서운 아빠의 얼굴이 덧씌워졌고, 나는 마치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당황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게 되어버린 거다.

“형일아 괜찮아.”

그녀가 나의 손을 잡고 토닥거리던 리스보아의 어느 역.

그 “괜찮아”에는 “날 무서워 하지마. 내 눈치 보지마. 엄마가 아니잖아. 아빠가 아니잖아.” 그런 말들이 숨어 있었다.


그때의 바람, 태양, 습도, 모든 게 지금 이 순간 떠오른다. 기차는 떠났고, 플랫폼에 내린 사람들도 모두 어디론가 떠난 그 공간, 거기엔 7살짜리 내가 홀로 서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과거의 나.


돌아보면 나는 오랫동안 이 중의 일부를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믿어왔다. 최대한 안 들키려 했고, 최대한 꽁꽁 숨겨두려 애썼던 것 같다. 물론 잘 안됐다. 오히려 그게 작은 문제를 더 키우는 일들이 많았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그 혼란스러움조차 ‘나’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 가끔씩 터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행동을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 하지만 그래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 이 “나”는 매번 새롭지만 때론 어제로 회귀하기도 하고, 때론 유사한 방식으로 동어반복적인 실수와 찌질함을 보이기도 한다.


텅 빈 역, 서 있는 화물차, 모자를 쓴 어떤 노인의 눈빛, 주인 잃은 개, 벤치 옆에 방치해둔 여행가방, 자신감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삶의 흥미로운 부분, 당황스러운 부분, 맨붕에 빠지게 하는 부분은 우리가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앞으로든 뒤로든. 뭔가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고, 아니라면 그저 그냥 운이 나빴던 것뿐이다.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맨붕에 빠지거나, 크게 기뻐하거나 크게 절망할 이유는 없다.


알면서도 잘 안 된다.


매번 마음에 되새기지만 자주 어디론가 미끄러져간다. 그날 오후, 멘탈이 역 밖으로 뛰쳐나갔던 그날 오후, 리스보아에서 오비두스로 가는 길을 주도한 것은 그녀였다. 팔을 걷어 부치고, 사람들에게 이것 저것을 묻는다. 구글맵을 켜고 한참을 드려다 본다. 그녀의 차분한 모습을 보고 조금씩 마음이 진정이 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몸과 머리가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천천히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두 시간 후 우리는 오비두스의 길을 걷고 있다.

인생은 역설과 우연의 연속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신트라에서 리스보아행 기차를 잘못 탄 것은 불운이 시작이었다. 리스보아의 한 낯선 역에 내려 황량한 플랫폼에서 우왕좌왕 하던 시간은 예상하지 못한 시간이었고, 그 시간에 내 머리 회전은 건전지가 다 닳은 시계 바늘처럼 멈췄다. 플랫폼에서 얼음이 된 나의 손을 잡고 그녀는 역 밖으로 나왔고, 역을 빠져나왔더니 택시 한 대가 서있었다. 그녀는 나를 택시에 구겨 넣었고, “아저씨 버스터미널이요!”를 외쳤다. 아저씨는 휘파람을 불며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기 시작했으며, 그 역에서 버스터미널까지는 택시로 채 10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만약 기차와 지하철을 이용했다면 30분은 더 걸리는 거리였는데 말이다. 택시에서 내려 오비두스행 버스를 타는 플랫폼을 찾는데, 웬걸 바로 앞에 오비두스라 적힌 버스가 서있었다. 커리어를 끌고 버스 앞에 선다.


“올라~ 아저씨. 이 버스 오비두스 가는거에요?”

“운이 좋군. 동양 친구들. 2분 후 출발이야. 이거 놓쳤으면 다음 버스는 또 한참 기다려야 했어! 오늘 같은 더운 날에, 매연가스로 가득 찬 이곳에서 말이야. 축하해.”


신트라역에서 기차를 잘못 탔기 때문에, 맨탈이 나간 나를 대신해 그녀가 택시를 잡았기 때문에, 그 택시 운전사가 넓고 넓은 버스터미널 중 하필이면 오비두스행 버스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오비두스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누구한테 한 말이었을까? 인간은 아니었다.

삶의 우연성과 역설을 곳곳에서 마주하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겸손하게 되고, 어떤 식으로든 내 삶을 이끌어줄 신적인 손길에 몸을 낮추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지지대, 작은 손을 맡길 수 있는 큰 손을 간절히 바라게 되기도 한다. 그게 누구에게는 예수님이고, 마리아이고, 알라이고, 부처다.


#12 11오비두스.jpg
#12 12오비두스.jpg


하루가 저물어가는 저녁 오비두스의 한 성문을 지나고, 성곽을 오르고, 돌계단을 내려가고, 갈색의 지붕과 흰 색의 집을 통과하면서, 담쟁이 넝쿨과 야생화와 십자가를 마주하면서 묘하게도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루여, 흔들리지 않는 네 종말을 향해서 걱정말고 가라. 걱정말고 네 종말을 향해서 가라. 꺼져가는 빛들의 파도여. 이 쓸모없는 오후의 멜랑콜리여. .. 부드럽게, 이 수채화 같은 오후 불분명하게 흩어진 옅은 푸른색 창백함이여, 가볍게 가라앉아라. .. 지루하게 과잉이면서 경직이 아닌 채로! (같은 책, p. 339)"


이 조용한 시골의 저녁은 언약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재다. 하루를 돌아본다. 신트라의 무어성, 리스보아의 허름한 지하철역, 그리고 오비두스의 실재. 나른한 피곤과 허기가 찾아온다. 오후의 분주한 감정과 거리가 퇴색하면서 밤이면 피할 수 없는 고요가 조금씩 오비두스를 감싼다. 해질 녁 오비두스의 거리를 걸으며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우리의 삶을 생각한다.


#12 13오비두스.jpg


“그렇다. 우리 모두는 사라질 것이다.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감정과 장갑을 착용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모든 것은 그림자이고 휘몰아치는 먼지바람이다. (같은 책, p. 357)"

그러니 괜히 마주하게 되는 사건과 불운에 과도하게 절망하지도, 걱정하지 말고, 맨붕에 빠지지 말자. 우리 모두는 모두 종말을 향해서 가는 중이다. 걱정말고 가자. 한걸음, 한걸음.


#12 15오비두스아침.jpg
#12 16오비두스.jpg
#12 18오비두스.jpg
#12 20오비두스.jpg
#12 17오비두스.jpg
#12 19오비두스.jpg

<참고문헌>

Pessoa, F. (1999). The Book of Disquiet. 배수아(2014). 불안의 서. 통영: 봄날의 책.

이전 11화# 11. 중세의 힘, 무어인의 발길을 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