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코임브라, 우리 모두에게 저녁은 올 것이다.

by 오윤
우리 모두에게 저녁은 올 것이다. 우편마차는 도착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마음껏 즐긴다. 나는 더 캐묻지 않는다. 애쓰지 않는다. 지금 써넣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읽히게 된다면 그들의 휴식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무도 흥미를 느끼지 않아도 괜찮다. (Fernando Pessoa, 1999/2014, p. 26)


레이리아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고 있다. 버스는 나자레를 출발해 산길로 들어선다. 구글맵을 보니 알코바카(Alcobaca)라는 곳을 지나고 있다. 해변을 벗어난 버스는 산길을 천천히 오른다. 오른편으로 쎄요로스 블러블러 자연 공원(Seyros de Aive e Candeeiros Natural Park)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그 뒤로 변산반도의 내변산 정도 되는 느낌의 숲이 자리하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서너 개 정도 되는 지역의 풍경을 지나쳐가는 것만 같다. 후미진 건물, 녹음 짙은 숲, 푸른 바다, 하얀 농가, 스쳐가는 풍경을 스쳐 보내면서 나는 스쳐가는 일상의 한 자락을 보낸다. 나른하게, 지루하게, 평화롭게, 불안하게.

버스는 한 시골의 터미널에 정차 중이다. 전북 고창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는데 정읍 터미널에서 잠깐 정차하는 느낌이다. 오늘의 하늘은 회색빛 구름이 가득하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이것 역시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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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코임브라로 가는 여정이었다. 나자레에서 코임브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두 번 출발한다. 오전과 오후 한 대씩. 아침 버스는 11시 출발. 10시 즈음 체크아웃을 하고 그녀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는 티켓을 사기 위해 작은 버스터미널 티켓부스로 향했다.


나자레 시골의 작은 버스터미널. 라디오에서 음악이 흐르고, 리듬에 맞추어 머리, 어깨를 들썩이던 앤젤라가 반갑게 인사한다.

“좋은 아침이야. 어디 가니?”

“봄디아~~ 코임브라에 가려해.”

“코임브라, 젊은 도시지. 음악이 흐르는... 넌 코임브라하면 파두만 알 텐데, 꼭 그렇지 않지. 가서 느껴봐. 여기에서와는 완전 다른 감각으로...”

갑자기 이야기를 멈춘 그녀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슬픈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어쩌지. 아침 버스가 만석이야. 오후 버스는 5시에 있어. 너무 늦지?”

“어쩌지, 너무 늦어.”

서로 난감한 표정을 짓는데 그녀가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빠른 호흡으로 내게 말한다.

“10분 후 레이리아로 가는 버스를 타. 거긴 이 지역 버스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이야. 대도시란 거지. 거기가면 코임브라행 버스는 시내버스처럼 만날 수 있어.”

“10분 후?”

“응 10분 후.. 10시 40분”

그녀가 모닝커피를 마시는 곳까지 5분 내에 뛰어갈 수 있을까? 10분 내에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어쩌면... ‘오브리가도’를 외치며 일단 나는 뛰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보던 그녀의 손을 낚아채고, 여행가방을 끌며, 반환점을 돈 것은 그로부터 4분 후. 그리고 다시 4분 정도 지났을 때 헐떡이는 발걸음 앞으로 버스터미널이 보였고, 동시에 터미널로 들어오는 버스 한 대도 보였다. 멈출 수 없었다.

달려. 달려. 달려!!

헐레벌떡 버스에 착석한 시간, 10시 40분.

그때의 심정은, 뭐라고 할까,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20대 초반의 젊음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래 다 덤벼봐!!!! 내 다 상대해주리라. 심장은 가슴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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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레에서 레이리아를 거쳐 코임브라에 도착한 것은 오후 한 시. 첫 인상이 어땠냐구? 이 역시 젊었다. ‘그래 내가 상대해줄 테니 다 덤벼!’’하는 느낌의 기운이 동서남북에 가득했고, 무엇이든 해도 다 용인될 것 같은 느낌의 도시였다. 이 도시는 몬데구 강이라는 긴 강을 끼고 있었고, 언덕과 계단과 대학으로 둘러싸인 동네였다. 코임브라는 언덕을 지킨다는 뜻인데, 그냥 지어진 이름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려 호스텔까지 가는 길은 좁고 좁은 돌계단으로 된 언덕을 오르고 오르는 시간이었다. 젊은 것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커리어를 끌고 가는 중년의 것들에게는 조금은 벅찬 시간이기도 했다.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 울고 넘는 박달재를 여행가방 낑낑대고 울고 싶은 마음으로 넘는 심정이었다.


여행책자를 열면 코임브라에서 놓쳐서는 안 될 두 가지를 알려준다. 하나는 코임브라대학 산책, 특히 해피포터에 나왔을법한 조아니나 도서관 견학은 잇아이템이다. 또 하나는 저녁의 파두 공연, 리스보아의 파두와 달리 코임브라의 파두는 젊은 대학생들이 주축으로 공연된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스텔에 짐을 놓아둔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좁은 언덕길에 자리한 한 작은 음식점의 야외 테라스였다. 박달재를 넘어 온 지금 필요한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시원한 맥주 한잔이었다. 배도 고팠다.


포르투칼에 와서 만난 음식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한국인의 밥상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매번 느끼게 되는데 여기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제법 어울린다. 굴벤키안 미술관 카페테리아의 해물밥은 서울시립미술관 카페에서 먹었던 해물 리조또를 떠올리게 한다. 리스보아의 허름한 기찻길 옆동네에서 먹은 바칼라우와 정어리구이는 영등포의 생선구이집을, 카이카이스의 커리전문점은 광화문의 인도 음식점을, 신트라 궁전의 파스타집은 경의선 숲길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삼겹살 스테이크와 고추저림이 인상적이었던 오비두스의 하몽하몽은 마포의 한식주점을, 그리고 감자튀김과 햄버거 스테이크가 일품이었던 코임브라의 작은 바는 부암동의 단골맥주집을 떠올리게 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먹든 한국의 어딘가를 떠올리게 했고, 가격은 ‘응답하라 1997’ 수준의 가격이었다. 와인 한 병을 13000원 정도로, 맥주 한 병을 2000원 정도의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곳은 무엇을 먹든 기분 좋을 수밖에 없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늦은 점심과 시원한 맥주 한잔씩을 마신 후 천천히 코임브라의 골목 골목과 코임브라 교정을 걷는다. 검은 망토를 두른 젊은 친구들이 보이고, 하얀 란닝구에 담배 한 대를 문채 저 멀리 몬데구강을 바라보는 눈빛이 보인다. 밀라노에서 왔을 법한 긴 머리 모델 소녀는 돌계단 위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코임브라 성당 주변은 결혼하는 커플과 하객들로 시끌벅적하다. 골목의 흰 벽에는 “we are the mads, the sads, and the bads”라는 글자와 수많은 그래피티 아트들이 피아노 교습생의 음계 소리처럼 곳곳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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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것은 코임브라 마을과 연결된 대학의 정문이었다. 수백 개의 계단을 내려가야만 마을과 마주하게 되고, 수백 개의 계단을 올라야 대학에 입성하게 된다. 마을에서 보는 대학, 대학에서 보는 마을. 이 높이와 차이에 어떤 엘리트의식과 책임감이 깃들어져 있다. 코임브라대학은 1290년에 지어진 서구 최초의 대학이라 한다. 대학의 중심에 있는 대관홀(great hall of acts)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한때(1143~1383) 포르투칼 첫 번째 왕국, 왕들의 집정실이었고 대학설립 이후에는 대학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이 공간은 해리포터의 한 무대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조앤 K. 롤링이 해리포터를 집필하며 영감을 받은 배경이라고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런데 막상 돌아보면 진짜 영감을 받았을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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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홀 옆에는 우리로 치자면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르는 시험의 방이 있고, 이 방 밑자락에는 학샘 감옥이 있다. 학생감옥은 저녁에 통금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규율을 어긴 학생들이 갇히던 공간이었다고 하는데, 이 감옥 벽에는 많은 문구들이 새겨져있다.

나 삐뚤어질거야, 정확히 번역되지는 않지만 뭐 이런 류의 이야기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학생감옥을 나와 이 대학의 상징인 요아니나 도서관에 들어가본다. 이 도서관의 역사와 웅장함에 마음이 압도되는 느낌이다. 한때 온 세계를 재패한 제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도서관의 향기, 색깔, 형태가 가감 없이 보여준다. 금으로 범벅된 벽, 넓은 테이블, 세월의 깊이가 드리워진 고서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넓은 테이블과 높은 서가였다. 제국의 도서관은 높고 넓은 거다. 이 높고 넓은 곳에서 공부를 하면 참 잘되겠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쓸데없는 생각은 도서관을 나오니 곧장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치 ‘코임브라 필수 과목’ 기말고사를 마치고 나온 심정이라고 할까? 시험을 마치고 마을로 내려오는 길, 내려다보이는 강과 마을은 기막히게 아름다웠고, 몬테구 강을 배경으로 해기 지는 풍경은 멋스러웠다. 이제는 이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신나게 놀아야 할 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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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지고 저녁이 되면 코임브라는 남녀노소 모두가 밤을 즐기는 축제의 공간이 된다. 한 켠에서는 삼겹살 바비큐가 구어지고,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이 잔뜩 차려입고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또 다른 한켠에서는 파두가, 또 다른 한켠에서는 아코디언 합주단의 음악이, 또 다른 한켠에서는 재즈음악이 흐른다.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맥주와 와인 잔을 들고 춤을 추고 떠들고 웃는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 코임브라의 도심, 3살짜리 꼬맹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먹고 부르고 마시고 웃고... 코임브라는 그런 공간이었다.


여행책을 보면 코임브라의 파두는 세월의 흔적, 지나간 사랑, 떠나보낸 슬픔과 한이 짙게 묻어 있는 리스보아의 파두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는데, 코임브라의 밤거리를 반나절만 걸어 봐도 그럴 수밖에 없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코임브라는 풋풋하고 사랑스럽고 젊고 상큼하다. 골목의 작은 바, 바에서 울려나오는 음악 소리,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 시원한 밤바람, 넘쳐나는 술잔, 음악에 맞춰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도시, 이 오래된 도시에서 보내는 한가로운 저녁의 긴 시간들이 나를 감동시킨다. 그 감동의 근저에는 가벼움이 있다. 흥이 있다. 젊음과 자유로움이 있다. 만약 천국에 그런 것들을 위한 영토가 없다면 천국은 아예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밤이다.



<참고문헌>

Pessoa, F. (1999). The Book of Disquiet. 배수아(2014). 불안의 서. 통영: 봄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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