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하루를 시작합니다! 렐루서점.

by 오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 하루의 모든 내용을 칠판에서 지워내는 일,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아침을 사는 일, 우리 감정의 처녀성을 반복해서 부활시키는 일, 그것이 오직 그것만이 존재와 소유의 가치가 있다... 도시의 높은 언덕들! 거대한 건축물들을 붙잡아 더욱 거대하게 만드는 가파른 비탈들, 계단 모양으로 쌓여 뭉쳐 있는 갖가지 색의 건물들, 그림자와 화염으로 이루어진 햇빛이 건물들을 모아 무늬를 짠다. 너희는 오늘이다. 너희는 나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너희를 보고 있기 때문에. 내일 너희는 내일의 내가 될 것이다. 두 척의 배가 엇갈려 지나갈 때 서로 알아차리지 못한 그리움을 뒤에 남겨두듯이, 뱃전에 기대선 나는 그렇게 너희를 사랑한다. (Fernando Pessoa, 1999/2014, p. 186)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시간이 빚어내는 색채, 향기, 형상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늘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날에 도착한 도시는 거기가 어디든 천국이며, 미세먼지가 뿌옇게 끼인 어느 날에 도착한 도시는 거기가 어디든 디스토피아다. 인간은 자유를 외치지만, 많은 경우 외부 세계와 깊게 연동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리고 이 마음은 매 시간 늙어가면서 어떤 감각은 더 밝아지고 어떤 감각은 더 우울해지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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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에서 3일째, 하늘이 기막히게 맑은 어느 날이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동실동실 떠다니는 아침 일찍 그녀를 깨워 렐루서점으로 향한다. 렐루서점은 가까우면서도 먼 곳이다. 머물던 숙소에서 3분 거리에 있지만, 매번 너무 많은 대기 줄이 있어 ‘다음으로 다음으로’ 미루다 어느새 마지막 날이 된 거다. 해리포터의 배경이 된 서점, 무명의 한 소설가가 포르투에서 글을 쓰고 아이를 키우던 시절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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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루 서점은 조앤 K. 롤링이 해리포터를 처음 구상한 곳이라 알려져 있다. 아마 구라일 거다. 해리포터를 구상하기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20대 후반, 4개월 된 아이를 유머 차에 태우고 다니는 이혼녀.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고,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던 조앤 롤링. 지금 여기가 싫어서 바다 건너 포르투에 영어 강사로 취직을 했다. 한 남자를 만나 전광석화처럼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했고, 그보다 빠른 속도로 아이를 낳고 이혼을 했다. 이혼 후 그녀는 다시 한 번 지금 여기와의 결별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 정착한 곳이 에든버러였다. 해리포터가 탄생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95년이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가면 ‘엘레펀트 하우스’라는 카페가 있다. 조엔 롤링이 어린 딸을 유머차에 태우고 산책을 하다 잠이 들면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미친 듯이 글을 썼던 카페로 유명한 곳이다. 아마도 해리포터의 대부분의 디테일은 포르투가 아니라 에던버러의 작은 카페에서 만들어졌을 거다. 그러나 거기서 어떤 이야기를 직조했나,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상상 속에 포르투의 흔적이 적지 않게 묻어 있다. 가령 렐루 서점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중앙 계단은 호그와트의 움직이는 계단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분명 있다.


렐루서점의 중앙 계단을 오르내리다보면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일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빚어내는 색채, 향기, 형상과 무관할 수 없으며, 그 빛깔의 어떤 영역은 시간과 더불어 늙어가고, 농후해지고, 밝아지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정말로 노력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면 말이다. 문제는 그런 노력을 하기에 삶의 목표에 있어 대부분의 사람은 똑같이 태만하고 대부분은 한결 같이 목표에 대해서는 포기해버린 상태로 똑같이 밋밋한 삶을 산다는 것. 그렇게 젊은 날의 꿈과 소망으로부터 편하게 결별한다는 것. 반면 어떤 사람들의 경우 그걸마음 속 깊이, 노트 속 깊은 곳에 새겨놓다 어느 순간 카페에서, 도서관에서, 방 안에서 새로운 스토리와 차원이 높은 무의식으로 변화시키다는 것.


조앤 롤링, 렐루 서점, 해리포터. 이 세 꼭지점은 평범하지 않으며 태만하지 않으며, 당면한 삶의 절체절명 위기를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꿈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으로 돌파해 간 한 작가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렐루 서점의 줄, 이 줄이 욕망하는 평균적인 이야기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보편적 문장이다.

‘그래도 포르투에 왔으니 여기서 사진 한 장은 찍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보편성 위에 개별적인 이야기가 아주 잠깐 덧붙여진다.

“나도 돌파해 갈 수 있다고! 밋밋하지 않게, 타협하지 않으면서, 놀라운 이야기로~~~”


렐루서점 앞 아침 9시 30분, 눈에 보이는 세계는 파란 하늘, 찬란한 태양 빛 아래서 그 어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침이다.

“자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서점의 문이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서점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 그곳에 들어가자 내 안에 숨어 있는 어떤 낯선 것이 그늘 속에서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내게 좀 더 도전적이고, 새로운 이야기에 도전하라며 부추긴다. 아마 이런 목소리는 얼마 안 가 사라질 거다. 한때 작가를 꿈꿨던 직원이 해리포터 복장을 하고 고객들을 안쪽으로 인도하고 있고, 한때 포르투갈에서 출판되는 모든 책의 첫 구절을 암기하며 주민들에게 책을 추천했던 큐리이터는 여행자들에게 5달러 입장권을 파는 매표원이 됐다. 그게 씁쓸하다는 게 아니라, 그게 삶이다.

거대한 꿈, 도전적 삶, 놀라운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자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라는 목소리와 함께 저 멀리 흩어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생활이 요구하는 강박, 제 시간에 맞추어 서점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줄을 맞춰 서점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 좋은 강박. 서점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사람들, 서점 옆으로 인도가 있고, 골목이 있고, 테주강이 흐르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시원한 바람. 이거면 충분하다. 원래 나는 이런 사소한 일에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거대한 우주 공간의 이 조그만 귀퉁이의 익숙함과 아름다움이 좋다.




<참고문헌>

Pessoa, F. (1999). The Book of Disquiet. 배수아(2014). 불안의 서. 통영: 봄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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