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바라보고 술을 한잔 마시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벼운 산들바람, 목적도 의도도 없는 대화, 와인 한 잔, 화사한 꽃들, 오직 그것들만이 페르시아 현자가 가진 욕망의 최대치다. .. 욕망이나 희망, 세상에 대해 뭘 좀 안다는 듯한 쓸데없는 겉멋, 세상을 지배하거나 개량하려는 어리석은 야심은 그만두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은 허사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Fernando Pessoa, 1999/2014, p. 738)
아베이루행 기차를 타고 있다. 아베이루에서 하루, 다시 리스보아로 돌아가 거기서 이틀을 보내면 서울로 돌아간다. 세상의 끝, 이베리아 반도 끝에서의 시간이 마무리되고 있는 거다.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서울에서 느꼈던 여름날의 끈적거림, 가려움, 혼란, 분노, 욕망, 풍문, 혼잡이 많이 차분해진 느낌이다. 여기서 배운 게 있다면 삶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거다. 머리에 힘을 빼고 음악이 흐르면 춤을 추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올라!’하고 웃는 거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레슬링 자세로 뒹굴고, 누군가 기도를 하면 그 시간과 공간을 함께 호흡하고, 누군가 눈물을 흘리면 아파하고,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 천천히 끄덕거리면 되는 거다. 그리고 툭툭 털고 일어나는 거다. 기억과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은 채 매번 다른 나를 만들어가는 거다. 어제의 나, 오늘의 나, 포르투에서의 나, 아베이루에서의 나, 모두 다른 나다. 그러니깐 존재 자체가 여행이다. 나는 매일같이 내 몸이라는 기차를 타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향한다. 이 성격에서 저 성격으로, 이 역할에서 저 역할로, 그리고 그 여행에서 진심 나와 너의 ‘have a nice day’를 기도하는 거다.
포르투에서 3일을 돌아보면 그 안에서 가장 강렬하게 화면 위에 새겨질 자막은 ‘Sacrifice'였던 것 같다. 수많은 성당이 있었고, 그 안을 살짝 살짝 드려다보면서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생각했다. 예수님의 고단한 표정, 마리아의 눈물,
‘주님의 말과 행동을 닮겠습니다.’
그 말의 무게를 생각한 계기였다. 인생은 매순간 크고 작은 희생을 요구한다.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살아 숨쉬는 것들과의 관계망을 지나는 거다. 그 관계망을 관통해갈 때 우리는 그 세계 속에서 자주 분노하고, 억울해하며, 시기한다. 더 이상 그런 감정에 상처를 받지 않겠다면서 내 마음의 자물쇠를 꽁꽁 잠근 채 무미건조하게 냉담하게 그 관계망을 지나가기도 한다. 포르투에서 마주한 성당, 교회, 십자가,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 속에서 자주 ‘Sacrifice'라는 단어를 떠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잘 안될 거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는, 삶을 잘 살아간다는 것에는 분명 ’Sacrifice'적인 요소가 있다. 신약성서의 이야기를 단 한마디로 압축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이웃이라는 대상이다. 인간, 사회, 국가, 인류 이딴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상 아무도 그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마주하는 이웃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주변을 위해 조금은 희생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다짐해본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위대한 일인지를 나는 포르투의 여러 성당을 지나면서 매번 다른 식으로 느꼈던 것 같다.
아베이루에 도착했다. 여행 책을 보면 아베이루를 ‘포르투칼의 베네치아’로 소개한다. 아마도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운하가 있고, 그 운하 사이로 몰리세이루(수초를 잡는 남자)라 불리는 수많은 나무배가 다니기 때문일 테다. 막상 아베이루에 도착해보니 여기는 베네치아도 아니고, 이제껏 다닌 지역과도 다른 매력을 뿡뿡 풍긴다. 아기자기하고 건물도, 배도 각자의 개성을 색깔로 문양으로 소소하게 자랑질이다. 그런데 이 자랑질이 유별나지 않고 아베이루라는 큰 도화지 속에 꽤 조화롭게 점점이 박혀 있다.
여행가방을 끌고 아베이루의 중심지를 걸어가는데 몰리세이루를 탄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흔든다. 아베이루는 다른 포르투칼 지역과 비교할 때 마을 전체에 약간의 풍요로움이 깃들어져 있다. 다양한 문양과 캐릭터가 새겨진 유람선이 조용히 꾸준히 수로를 오가는 가운데 최고급 브랜드와 쇼핑몰이 과하지 않게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한다.
아베이루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푸르른 하늘과 대서양, 형형색색 줄무늬 마을, 흰 파도 삼박자로 가히 인스타그램 시대에 가장 최적화된 공간인 코스티노바 해변이다. 이 해변은 아베이루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된다. 버스 안에서 만난 10대들든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끊임없이 끌어안고 웃고 눈을 마춘다. 해변에 도착한 6명의 20대들은 ‘야 바다다’를 외치며 좋아라 춤을 춘다. 3명의 아이와 여동생을 대동한 흑인 여성은 선글라스 위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춤을 춘다. 삶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
코스티노바 해변. 모래사장 한 켠에 누워 본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바람은 시원하다. 햇살은 따사롭다. 파도소리가 우리의 해변을 울린다. 그리고 하얀 백사장으로 곱게 퍼지며 밀려오는 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 마음이 도시가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감정으로 동요할 때 이 해변에서의 오후를 떠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는 것은 관념도, 이상도, 기적도 아니다. 푸른 바다에 비치는 따뜻한 햇살이, 하얀 백사장 아래로 난 오솔길이, 오래된 동화 속 마을에서 보내는 한가로운 긴 오후의 시간들이, 설사 그것이 아주 짧은 시간의 백일몽에 가깝다 하더라도 우리를 훨씬 더 감동시킨다.
거의 대부분이 수영복을 입고 있지만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비치에 누워 선탠을 한다. 옆에 친구들과 수다를 떤다. 책을 본다. 1유로짜리 샌드위치를 먹는다. 잠을 잔다. 글을 쓴다. 코스티노바는 독특한 색감의 집들 앞에 포즈를 잡는 걸로 유명하지만, 내게 이곳은 바람 파도 태양 모래 언덕의 공간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이미 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걸 모를 뿐. 또는 그 소중함을 몰라 망쳤을 뿐...
아베이루로 돌아온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는 도시를 운하를 따라 걷는다. 몰리세이루를 운전하는 친구들이 인사를 건낸다. 오늘 저녁에는 아베이루 여기저기서 음악 축제가 있는 것 같다. 10대 후반의 아이들 수십 명이 열을 맞춰 박수를 치며 돌아다니고, 저 멀리 공원 어디서는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기막히게 노래를 잘 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냥 즐길 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서울의 한 카페, 아베이루의 하늘을 떠올린다. 바람, 운하, 손을 흔드는 사람, 올라 눈웃음을 짓는 환대의 포옹, 수제버거와 시원한 맥주와 거대한 대서양의 파도와 카누를 타던 아이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그리고 7살 꼬맹이들의 놀이터를 떠올린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워즈워스, p. 210)."
또 하나의 시간의 점이 만들어진 것 같다.
<참고문헌>
Pessoa, F. (1999). The Book of Disquiet. 배수아(2014). 불안의 서. 통영: 봄날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