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페스트> 읽기 1
<코로나 19> 이야기의 마지막은 알레르트 카뮈의 소설 <페스트> 두텁게 읽기다. 이 소설은 페스트로 봉쇄된 프랑스 오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많은 경우 사실보다 픽션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나는 믿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힘을 얻기도 했고, 삶이 조금 아프고 쓸쓸하다는 생각도 했다.
왜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 소설 <페스트>를 통해 코로나 19를 지나는 지금 이 시간, 캐어낸 진실은 무엇일까? 아직 언어로 명징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조금 길지만 소설 <페스트>를 복기해보려 한다.
<페스트>는 크게 5부로 되어 있다. 우선 1부다.
이야기의 배경은 프랑스의 도시 오랑.
오랑시 자체는 보기에 흉했다.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어 다른 도시들과 다른 점을 알아차리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령 비둘기, 나무, 정원이 없어 새들의 날개짓도 나뭇잎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접하지 못하는 완전히 밋밋한 곳인 한 도시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 봄소식은 오직 공기의 질을 통해서만, 혹은 어린 장사꾼들이 교외에서 가져오는 꽃바구니를 통해서만 전해질 따름이다. 바로 시장에서 팔리는 봄인 것이다(p.9).
그러니깐 오랑시는 인류가 직조한 인공의 도시이자, 시장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퇴근 후 일정한 시간에 카페에 모이거나, 한적한 길을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있는다. 젊은 축에 속하는 자들의 숨소리는 과격하고 고령자들의 놀이는 쇠공 굴리기 동호회, 친목회 회식, 카드 도박 모임 정도다.
카뮈가 묘사한 오랑의 독특한 점은 죽을 때 겪을 수 있는 불편함이다. 병자는 외롭다. 병자는 외롭지만, 사람이란 익숙한 것들이 있으면 곧 어렵지 않게 생활하는 법. 익숙함의 각도에서 보면 오랑은 살아가는데 아주 척박하거나 무미건조하지는 않다. 오랑 시민들이 가진 솔직하고 정겹고 활동적인 태도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카뮈는 진단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오랑의 시민들에게 페스트의 창궐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왜 하필 여기에?
시작은 죽은 쥐들의 출현이었다. 그 다음에는 죽은 쥐들을 치우던 수위의 죽음. 죽음은 구석진 곳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공포는 그 죽음이 구석을 넘어 중앙으로 중앙으로 진격하면서 커져갔다. 그리고 공포와 더불어 성찰이 시작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진지함이 쾌활한 도시에 묻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오랑시가 페스트에 물드는 과정을 묵묵하게 적어낸 사람이 있다. 장타루. 소설 <페스트>는 장타루가 기록한 메모장을 매개로 상당부분 직조되는데, 그는 페스트가 창궐하기 몇 주 전 오랑에 도착한다. 어떤 이유로 오랑에 온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스페인 무용수들이나 음악가들을 꾸준히 만났고, 무질서한 상태에서 이야깃거리가 없는 것을 기록하는 걸 좋아했다. 타루는 도시의 외양과 사람들의 활기, 심지어 쾌락까지도 돈에 의해 조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의 상업적 성격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 부분에서 왠지 오랑은 서울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주인공은 의사 리외다. 장타루는 자신의 메모장에 의사 리외를 이렇게 묘사한다.
서른다섯으로 보인다. 중간 키, 딱 벌어진 어깨, 거의 직사각형 얼굴, 색이 짙고 선이 바른 눈, 튀어나온 턱, 큰 코는 균형이 잡혀 있다. 아주 짧게 깎은 검은 머리, 입은 활처럼 둥글고, 입술은 도톰하고 거의 항상 다물어져 있다. 그을린 피부, 검은 털, 늘 짙은 색이지만 그에게는 잘 어울리는 옷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시칠리아의 농부 같은 모습이다. 그는 빨리 걷는다. 걷는 속도를 바꾸지 않고 인도로 내려서지만 세 번 중 두 번 정도 가볍게 뛰어 반대편 인도로 올라선다. 차를 몰 때는 방심하는 편이라 모퉁이를 돈 뒤에도 흔히 방향등을 안 끄고 그냥 간다. 항상 모자를 안 쓴 맨머리. 통달한 표정(p. 35).
페스트가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리외는 의사협회 회장인 리샤르에게 환자들의 격리를 요청한다. 리샤르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나는 권한이 없다’며 도지사에게 공을 넘겼다. 도지사는 어땠을까? 우왕좌왕, 쭈삣쭈삣. 그렇게 공이 여기서 저기로 넘어가고, 설왕설래 말만 수없이 오가는 동안, 날씨는 나빠졌고, 전염병은 퍼져나갔으며, 시내에는 맥없는 무기력증이 팽배했다.
이 맥없는 무기력증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날씨의 포로가 된 어느 날, 리외는 시청에 근무하는 임시직 공무원 그랑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같은 건물에 사는 코타르가 자살을 기도했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그는 절망한 사람이에요.”
그랑은 코타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를 절망한 사람이라 불렀다. 그랬다. 코타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내적 비애가 컸던 사람이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주 우울했고, 그래서 무기력증이 팽배한 어느 날 자살을 시도한다. 코타르 역시 서울 어디선가에서 만날 수 있는 캐릭터인데,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2부, 3부를 거치면서 나타나는 코타르의 변화다. 페스트가 확산되면 확산될수록 그의 삶은 생기를 되찾는데, 그 이야기는 뒤로 일단 미루고, 이번에는 페스트 확산 직전, 언론의 풍향을 보자.
한동안 쥐 문제로 유난히 수다를 떤다 싶더니 언론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해 알베르트 카뮈의 진단은 기막히다. 쥐는 거리에서 죽었고, 사람들은 방 안에서 조용히 죽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앙이란 항상 있는 일이지만, 막상 들이닥치면 사람이든 언론이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단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통찰 아닌가? 카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본다.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가 많이 있었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안 갈 거야.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 그리고 분명 전쟁은 너무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계속되지 않는 건 아니다. 어리석음은 항상 끈덕진 법이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잴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비현실적인 것, 곧 사라지고말 악몽으로 여긴다.
하지만 재앙은 사라지지 않으며,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바로 사람들인데, 그 선두에 인간주의자들이 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재앙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크지 않았고 겸손할 줄 몰랐을 뿐이다. 그들은 그저 아직 모든 것이 자기들에게는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계속 사업을 했고, 여행을 준비했으며, 각자 나름의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p. 42).
재앙의 첫 번째 희생자가 인간주의자들이라는 사실, 겸손할 줄 모르고, 모든 것이 자기들에게는 가능하다고 믿는 에고주의자들이라는 담담한 묘사에 나는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 아마도 이게 진실이기 때문일 거다. 그리하여 필요한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쓸데없는 잔영을 쫓아 버리면서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대책이 있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카뮈는 리외의 목소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확신은 저기, 바로 매일 매일의 노동에 있었다. 그 나머지는 실오라기나 무의미한 움직임에 달려 있으니 그것에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었다(p. 46).
정말 그게 전부야? 그렇다. 그게 전부다. 적어도 알베르트 카뮈가 직조한 세계관에서는 말이다. 이 세계관에 가장 부합한 인물이 누구냐 하면, <페스트>에서는 그랑이라는 친구다. 그는 임시직 시공무원이다. 그랑은 젊은 날의 거의 모든 시간을 시를 위해 일하는 것에 보냈고 그러나 그의 급여는 보잘것 없었다. 그의 독특한 점 중 하나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로서는 일한 만큼의 정당한 보수를 주장할 수 있지만,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를 지지했던 선배들은, 상사들은 죽거나 떠났으며, 그래서 묵묵하게 자신의 본분만을 다할 뿐이었다.
이건 부당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가난하지만 성실했고, 삶은 모범적이었다. 선한 감정에 대해 항상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고, 오후 5시경에 조용히 울리는 동네의 종소리를 좋아했고, 퇴근 후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삶에 대해 계속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듯이 그랑도 젊은 시절 사랑을 했고, 결혼도 했었다. 결혼생활이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이유는? 일과 돈. 일은 과도하게 많았고, 그렇다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하는 남자, 가난, 서서히 닫혀 가는 미래, 밤이면 식탁에서 흐르는 침묵, 이런 세계에 사랑과 열정이 파고들만한 여지는 없었다. ‘당신을 많이 사랑했지만 이제 피곤해요. 떠나는 것이 기쁘지는 않지만 다시 시작하기 위해 행복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아내가 떠나면서 썼던 편지내용. 적당한 순간에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말을 찾아냈어야 했지만, 이때도 그랑은 적당한 단어를 찾질 못했다.
나는 그랑이라는 남자를 마주하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고, 누군가의 오늘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페스트가 마을을 장악할 때, 가장 용기있게, 그러나 묵묵하게 자원봉사단에 합류하여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역할, 총서기 역할을 해낸다. 한마디로 자기 본분에 충실한 거다.
자기 본분에 충실함에 있어 페스트 1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의사들과 도지사, 관료들이 모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게 좋을지를 논의하는 장면이다.
의사들은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는 것이었다. 조용히 노란 콧수염을 깨물고 있던 늙은 의사, 카스텔이 맑은 눈으로 리외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자기는 그것이 페스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가혹한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어쩔줄 몰라하던 도지사 리샤르는 주저하다 리외를 쳐다본다.
“이 병이 페스트라는 걸 확신하나요?”
“문제를 잘못 제기하셨습니다. 이건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입니다. 저는 표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마치 시민 절반의 생명을 빼앗길 위험이 없는 듯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리외가 말했다(p. 55).
자기 본분에 충실함이란 무엇일까? 위기의 국면에서 위험이 없는 듯이 행동하지 않는 것,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것, 책임을 떠넘기거나 주저하지 않는 것.
알베르트 카뮈는 리외의 목소리를 통해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 본분에 충실함은 말이 쉽지 실상에서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충실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러니깐 충실함보다 망설임, 주저함, 숨고 싶은 마음. 회피하고 싶은 마음, 헛된 기대가 앞설 때 삶도 세계도 급속도로 악화된다. 페스트 전염병이 단번에 급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페스트 1부다. 페스트 1부는 페스트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전의 오랑이라는 공간과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변화를 따라가는데, 어떤 곳에서는 코로나 19가 확산되기 직전의 서울을 만나기도 하고, 주변 이웃에서 만날 법한 인물을 만나게도 된다. 이들이 페스트와 함께 어떤 변화를 겪을까? 다음장에서는 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Camus, A. (1947). La Peste. 김화영 역 (2011). <페스트>. 서울: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