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와 이기적 유전자.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이런저런 반역 유전자를 달랠 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반역 유전자들이 인간 유전자 세트에 덜 위험한 방식으로 안착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고향에서 유영토록 하는 방편으로서 밈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코로나 19시대 이전의 밈이 단기적인 효율과 성장, 인간 중심적인 문화, 확장과 정복, 이념과 정치의 풀 안에 존재했다면 코로나 19 이후 시대의 밈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유효한가? 밈의 변화는 생존 기계로서 인간과 바이러스가 공존하는 유전자 풀들을 넓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리차드 도킨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우리가 비록 기본적으로 이기적 존재로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가 비록 불안과 공포와 차별을 내 안의 밈으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다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능력, 공존과 공감, 용기와 정의 등을 전면에 내세워 이기적인 밈들이 일으키는 최악의 이기적 행동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Dawkins, 1976/2006,, p. 349).”
무슨 말일까? 우리에게는 이기적 유전자와 이기적 밈에 반항할 힘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른바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하는 밈 풀의 작동. 관용과 강건함이 승리하고, 협력과 공존을 우선하며, 질투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배신하지 않는 강한 풀을 작동시킬 수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질문이 든다. 과연 그런 풀을 가진다고 코로나 19를 이길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하는 밈 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기 전 도킨스는 다음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바이러스와 전염병이 인류의 삶 속에 깊은 상흔을 남겼지만 삶도, 역사도, 문명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 바로 그런 이유로 코로나 19 이후에도 바이러스와의 게임은 되풀이될 거라는 사실말이다. 이 새로운 시대에 입장한 선수들이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든 지금하고 있는 게임이 최종회가 아니라는 점이다(같은 책, p.349~ 383.). 이 점만 기억한다면 우리는 보다 강건하고 관용적이며 협력적인 스토리들을 직조해낼 수 있고, 이런 스토리는 분명 위기의 국면에서 이기는 게임을 하게 되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 도킨스는 주장한다.
이게 무슨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천만에. 이건 경제학에서 나오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론의 핵심이라고 도킨스는 지적한다. 게임이론은 거칠게 말하면 두 가지 조건에서 인간들의 행동이 달라짐을 관찰해낸다. 우선 게임이 1회성이라면 배신, 간악, 질투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게임이 반복적이고 지속된다면? 보다 마음씨 좋고, 관용적이며, 질투하지 않은 방식으로 경기에 임하는 게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전략이자, 장기적으로 이기는 전략이다.
이런 주장을 한 대표적인 학자가 미시간대 로버트 액셀로드 교수(정치학)인데, 그는 게임에서 마음씨 좋은 전략이 유지되고, 협력과 관용, 신뢰의 안정적 패턴을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소개한다.
예측 가능성과 의식(의례).
가령 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 포병대가 독일 전선의 특정 지점에 시계처럼 정확하게 정기적으로 행하는 저녁 포격을 하는데, 액셀로드는 그와 같은 형식적이고 정기적인 발포 의식이 적들에게 이중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지적한다.
‘사령부에 대해서는 공격을, 적에게는 평화를’
게임이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액셀로드 교수의 낙관적 결론(질투심 없고 관대하며 마음씨 좋은 전략의 승리)이 코로나 19 시대에도 적용될까? 바이러스와 인간의 관계에도 적용될까? 당연히 그렇다고 나는 우기고 싶다. 다만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도킨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게임은 지속된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한 환기, 그리고 이 게임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 바이러스를 넘어 유전자 그 자체라는 것.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익이 아니라 유전자의 이익이고, 내 안에 자리 잡은 유전자는 다른 생물 개체의 몸에도 자리잡을 수 있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 되는 지점일 거다(같은책, p. 408~410).
이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의 전환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은 자주 머나먼 미래를 상정하지 못하며, 인간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식과 태도의 전환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해 도킨스는 인종, 민족, 국가, 인류, 바이러스, 박테리아, 동물 등 개체적 접근을 넘어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권한다.
자기복제자? 운반자?
하나하나 설명을 들어보자.
자기복제자는 자연 선택의 근본적 단위로 생존에 성공 또는 실패하는 기본적인 것, 때때로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수반하면서 동일한 사본의 계보를 형성하는 기본 단위다. 이 놈은 일반적으로 거대한 공동체적 생존 기계, 즉 운반자 속에 집단화된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운전자가 누구일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몸, 그 자체가 자기 복제자의 운반자인 거다.
운반자로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복제하지 못한다. 운반자는 자기 복제자들을 증식하도록 작용할 뿐이다. 한편 자기 복제자는 스스로 행동 하지 않는다. 세계를 지각하지도 못하며 먹이를 잡거나 포식자로부터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운반자를 만들 뿐이다. 양자는 서로 다르고 보완적이며, 많은 점에서 똑같이 중요한 역할, 즉 자기 복제자라는 역할과 운반자라는 역할을 배당 받는다(같은책, p.428).
이렇게 생각하면 흑인, 백인, 미국, 한국, 사람, 박쥐, 코로나 등 하나의 개체군을 따로 떼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너무 시시하다. 이 개체군들 역시 생존과 번영(번식)이라는 공통의 목적이 있지만 한 마리의 박쥐, 한 사람의 몸에서 볼 수 있는 유전자의 결속과 목적의 단일성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같은 책, p. 429).
우리는 오늘도 싸우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상처주고, 상처받는다. 그런데 인식의 지평을 인간의 땅에서 좀 더 넓은 유전자의 무대, 자기복제자의 무대로 확장해가면,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오래된 과거와 오래된 미래로 넓혀나가면 그 모든 싸움들과 논쟁들이 전부 시시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이 수천년동안 싸우고 논쟁하고 개발하고 확장하며 만들어간 문명의 논리가 코로나 19 앞에서 속수무책 무너진 것이 단적인 예다. 꼭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다. 우리는 알고 보면 자기복제자를 운반하는 운반자에 불과한 거다.
도킨스에 따르면 실제 전쟁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유전자의 영역에서 구성된다. 자기 복제자들의 전쟁터. 왜 유전자들은 커다란 운반자로 모여들었을까? 왜 유전자들은 집단을 이루고 자기들이 살아갈 커다란 몸체를 만드는 것을 선택했을까? 왜 어떤 바이러스 유전자들은 인간의 몸을 선택하는 것일까? 왜 어떤 바이러스 유전자들은 자기 복제의 속도가 빠르고, 왜 어떤 바이러스 유전자들은 운반자들을 아프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일까?
모든 생명은 단세포에서 시작된다. 조상의 설계고안을 DNA, 유전자의 프로그램 형태로 이어받지만 절.대. 그 조상의 신체 기관을 전수받지는 않는다. 그러니깐 부모의 심장을 그대로 전수 받는 게 아니라, 부모의 심장과 동일한 설계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생장하고 더 나아가 거기에 개선을 가하기도 한다. 이 생장과 개선의 원동력, 뿌리는 자기복제다.
우주에서 자신의 사본을 만들 수 있는 자는 어떤 것이든 자기 복제자이다. 자기 복제자는 최초로 우연히 작은 입자들이 마구 부딪쳐서 출현했을 거다. 이 과정은 완전하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자기 복제자들의 집단은 서로가 다른 몇 개의 변이를 품게 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든 인간이든 마찬가지다. 이같은 변이의 어떤 것은 자기 복제의 능력을 잃어서 그들 자신이 소멸할 때 그 변종도 아울러 소멸하고 만다. 또다른 변종은 자기의 조상이나 동시대의 다른 변종보다 훨씬 효율이 좋게 자기 복제를 한다. 그리하여 집단 중에서 우세해지는 것은 그들의 자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계는 가장 강하고 재주있는 자기 복제자로 채워져 나가게 된다(같은 책, p. 443).
또한 좋은 자기 복제자가 되기 위한 더욱 세련된 방법이 서서히 발견되어 간다. 흥미로운 것은 좋은 자기 복제자는 자기 고유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주변 세계의 성질 덕분에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지의 여부는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에 달려 있다(놀라워라~~ 자기 때문이 아니라 주변때문에 성공하다니~~~).
이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관계다. 서로가 이익을 주고받는 자기복제자끼리는 서로의 존재 하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운반자로서 바이러스, 세포, 동물, 인류의 창조와 진화 역시 자기 복제자끼리의 집결과 확장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같은 책, p. 444).
여기서 명심해야 하는 사실은 유전자의 효과, 좋은 자기복제자의 확장된 미래는 개체의 몸 속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유전자는 개체의 체벽을 통과하여 바깥 세계에 있는 대상을 조작한다. 대상의 일부는 생명이 없는 것이고, 어떤 것은 다른 생물이며, 또 어떤 것은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주 작은 상상력만 있다면 방사상으로 뻗은 확장된 표현형의 힘의 그물 눈 중심에 위치하는 유전자를 볼 수 있다. 유전자의 긴 팔에는 뚜렷한 세계가 없다. 모든 세계에는 멀리 또는 가깝게 유전자와 표현형 효과를 연계하는 인과의 화살이 종횡으로 교차하고 있다. 인과의 화살은 엉켜져 있고, 뭉쳐져 있다(같은 책, p. 445).
그렇다면? 코로나 19시대를 넘어서는 국면에서 우리의 밈은 어때야 할까? 다른 것 모르겠고, “내가 최고”, “우리가 최고”, 이 나르시시즘적 밈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일 것 같다. 나는, 인간은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생존기계, 운반자일 뿐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조금은 겸손하고, 다른 생명, 바이러스들과 공존하는 밈풀의 지대를 넓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나만 살겠다고, 내가 최고라고 우기는 최악의 인간적이고도 인간적인, 이기적이고도 이기적인 밈풀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출하는 것. 그러면서 새로운 확장된 관계장으로 들어가는 것.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는 쓰여져야 하는 것 아닐까?
“아주 작은 상상력만 있다면 방사상으로 뻗은 확장된 표현형의 힘, 그 힘의 중심에 위치한 유전자를 볼 수 있다. 유전자의 긴 팔에는 뚜렷한 세계가 없다.”
<참고문헌>
Dawkins, C. R. (1976). The Selfish Gene. 홍영남 역 (2006). <이기적 유전자>. 서울: 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