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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8등급? '썩은이'는 '의자사람'을 탓할 수 없다

아닌 밤중에 입시! 5

by 오늘나

조카는 영어학원을 다닌 5년 내내 지각도 결석도 없이 성실했다. 학원에 꿀을 발라놨나 싶을 정도로 과하게 열심히 다녔는데, 이상하게도 성적은 완벽한 하향 곡선을 그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이 기현상의 답은 바로 ‘개’였다. 조카가 다니던 학원 원장님은 유기견 보호일도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학원에도 개가 있었다. 조카는 그 개와 교감하며, 질풍노도 휘몰아치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그렇게나 열심히 학원 문턱을 넘나든 것이었다. 단기 기억력을 발휘해 학원 시험은 그럭저럭 통과하다 보니, 학원에서도 조카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지는 못한 듯했다. 진짜 실력을 요리조리 잘 속인 능력 탓에, 조카에게는 ‘영포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버렸다.


“고모, 영어 시험은 교과서 하고 부교재랑 외부 지문에서 나온대요. 부교재에서 제일 많이 나오고, 외부 지문에서 8개 나온다고 했어요.”

부교재? 외부 지문?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학교 시험인데 교과서 이외에서 문제가 출제된다고? 교과서만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면 어느 정도 승산도 있을 듯했다. 이런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날벼락 연타란 말인가?


“외부 지문은 어디서 나오는지 전혀 몰라?”

“네, 수능 기출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는데 확실히는 몰라요.”

“그럼, 다른 애들은 외부 지문을 어떻게 공부해?”

“애들이 다니는 학원에서 정보를 주는 것 같은데,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그동안 네가 다녔던 학원에서는 그런 정보를 안 줬어?”

조카는 말이 없었고, 나는 깊은 한숨, 아니 명상을 했다.


명상 별거 없다. 최대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깊게 내뱉으면 그게 바로 명상인데, 조카와의 영어 공부에는 그 명상이 꼭 필요했다. 자칫 ‘한숨’으로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아랫배에 힘을 주고 천천히 하다 보니, 복근에 힘이 생기는 놀라운 일도 생겼다. 정신적 어려움이 육체적 단단함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조카도 나도 ‘전혀 모른다’라는 물음표만 가득한 영어 시험은, 시작도 전에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수능 기출문제로 구성된 부교재를 살펴보니, 교과서보다 훨씬 어려웠다. 문법은 말할 것도 없이, 내용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말로 해석된 내용을 봐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분명히 한글인데······. 영어권 국가의 현직 영어 선생님들과 학생들조차 우리나라 수능 영어 지문 난이도에 경악했다고 하더니, 괜한 말이 아니었다. 오로지 영문법만을 위해 억지스럽게 만든, 어렵다 못해 기이한 문장들의 향연 같았다.


그나마 쉬운 교과서를 먼저 하기로 했다. 조카에게 본문을 해석하라고 했더니 30여 분 동안 두 문장을 가지고 끙끙거렸다. ‘chairman’을 ‘의자 사람’이라고 말하는 조카를 보며 다급히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의장이나 회장이 좋은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이긴 하니 아예 틀린 해석은 아니라고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영어학원을 5년이나 다닌 고등학교 1학년이 ‘chairman’을 모른다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중학교부터 지금까지 영어 곁을 맴돌고 있음에도, 언제부터인지 ‘suddenly’가 ‘갑자기’ ‘썩은 이’로 들리는 내가, 조카의 단어 실력을 나무랄 형편은 아니었다.


나나 조카나 총체적 난국이었다. 시험 보는 날까지 매일 24시간씩 영어만 한다고 해도, 교과서 한 단원도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완벽하게 현실이 되어버렸다. 교과서는 하다 말고, 부교재는 펼쳐보는 척만 하고, 베일 투성이 외부 지문은 애초에 포기한 상태로, 조카는 영어 시험을 봤다.


원어민들조차 어렵다고 하는 영어 문제를 푸느라 우리 아이들이 왜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목표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언어를 배워,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고, 다양한 정보도 얻고, 국제 사회를 이해하는 시야도 넓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오로지 서열화된 대학 중에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


또래보다 늦게 영어 공부를 시작한 아이들, 영어에 재능도 흥미도 없는 아이들, 영어 공부에 관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영어는 과연 뭘까? 조카는 영어를 처음 배울 때 발음 지적을 연달아 받으며 자신감과 흥미를 잃었고, 결국 싫어졌다고 했다. 잘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했다. 본인 딴에는 알아듣기 위해 애를 써도, 점점 어려워만 가는 수업과 시험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비록 영어 내신 등급은 낮지만, 생명을 사랑하고, 마음 씀씀이가 깊고, 예절 바르고, 재치 가득한 사랑스러운 아이가 영어 때문에 느꼈을 좌절감과 자괴감을 생각하니 속상했다. 그동안 내신을 위한 ‘숫자’로만 존재했을 아이가 안쓰러웠다. 영어 성적과 상관없이 존재 자체로 소중한 아이를 생각하며, 엉망진창이 된 영어 시험은 불어오는 바람결에 말끔하게 흘려보내기로 했다.






이 글은 2021년 11월부터 약 2년 동안 조카와 함께 했던 입시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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