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비빌 언덕!

아닌 밤중에 입시 8

by 오늘나

기대 이상의 빛나는 성적표! 하지만 그것이 결코 ‘해피엔딩’을 보장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열린 결말이자,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남은 2년여의 긴 여정을 위해 쓸데없는 흥분과 부담감을 내려놓고, 길 잃은 나의 방향감각부터 다시 찾기로 했다. 엉겁결에 조카의 기말고사 시험과목에 일일이 개입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후에도 계속 모든 과목을 직접 가르쳐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갈피를 못 잡게 된 것이었다. 능력도 없으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내 손으로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내 목을, 내가 죄고 있었다. 내 몸과 마음이 상할 것은 물론이고, 정해진 목적지를 스스로 찾으면서 얻게 될 조카의 배움까지 뺏을 것이 뻔한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동생 부부는 조카의 멘토가 되어 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입시에 대한 경험도 지식도 없으면서 입시 멘토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학원 강사도, 과외 교사도, 입시 컨설턴트도 아니고, 뭘까? 함께 하지만,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도움은 주는······. 결국 교육학 이론서에나 나올 듯한 그럴듯한 역할 대신, 묵묵히 조카의 곁을 지키는 ‘비빌 언덕’이 되기로 했다. 힘들고 도움이 필요할 때, 편히 쉬면서 다시 힘을 낼 때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비빌 언덕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응원만 해주면 될까? 단순히 응원만 하는 거라면, 굳이 나 아니어도 많았다.


진짜 ‘비빌 언덕’이 되기 위해서 일단은 부족함이 가득한 입시 지식부터 채우기로 했다. 본업을 팽개친 채 입시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기에, 가장 만만한 인터넷부터 뒤졌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보는 오히려 독이었다. 감정을 글로 배우는 것처럼, 난해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와닿지 않았다. 덕분에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고, 입시의 기본을 알기까지 모래알을 한 바가지 뿌린 듯 까끌거리는 눈과, 쉬지 않고 쪼아대는 편두통이 죽마고우처럼 언제나 함께했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이 바로 내신의 중요성이었다. 그렇다면 내신은 또 어떻게 올려야 하지? 너무 당연해서 조금은 민망하지만 ‘학교 성적 올리기’였다. 미술과 관련된 것은 미술학원에서 잘 지도해 주리라 믿고, ‘미술 입시’가 아닌, ‘입시’만 생각하기로 했다. 학교 성적만 올리면 수능도 당연히 해결되는 줄 알고, 수능은 아예 고민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고, 만족스러워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내가 그랬다. 시작부터 부실한 언덕이었지만, ‘학교 성적 올리기’라는 나름의 목표가 서고 나니 마음의 짐은 한결 가벼워졌다.


평소엔 관심 가질 이유가 전혀 없던 입시자료들도 살펴봤다. 원하는 정보는 대부분 유료였다. 하지만 유료 회원이 될 능력과 열정이 조금은 부족했던 터라, 입맛만 다셔야 했다. 원하는 입시자료를 마음껏 보면서, 필요한 강의도 들을 수 있는 무료인 곳이 필요했다. 무료 회원임에도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 줄 나만의 ‘비빌 언덕’이 간절했지만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유료 회원 가입을 망설이던 순간, 운명처럼 펭수가 나타났다. 웃기고 당돌한 말투만큼 개성 강한 몸매로 요란법석을 떨며 종횡무진하는 재미난 녀석이 글쎄 ‘교육 방송 연습생’이라는 생소한 명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가! 눈이 번쩍 떠졌다.


‘아! 맞다. 교육 방송이 있었지.’ 십 년 묵은 체증을 풀어줄 기세로 교육 방송 ‘고교 EBSi’가 다가왔다. 그건 단순한 방송이 아니라, 반짝반짝 빛나는 선물이었다. 다양한 주제로 분류된 여러 항목 가운데 ‘교과서 단원별 강의’와 ‘학교 시험 대비’가 듬직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suddenly가 썩은이로 들리고, 가끔은 한국말도 잘 못 알아듣는 내가 고등학교 영어 내신을 무슨 수로 해결해 줄 수 있겠으며, 국어 고전문법은 말해 뭐하겠는가. 사회탐구 영역에 어떤 과목이 있는지도 모르는 내게 교육 방송은, 그야말로 천만번을 비벼도 모자랄 ‘든든한 언덕’이었다. 학교별 교과서의 해설 강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대비 강의, 내신에 관한 자료까지 노다지가 따로 없었다. 김밥천국을 넘어서는 ‘내신 천국’이었다. 몸속 곳곳에 박혀있던 얼음덩어리들이 한순간에 녹아내린 기분이라고나 할까? 희망이 불끈불끈 치솟아 올랐다.


내친김에 강의도 들어봤다. 사실 먼 옛날 고등학생일 때 들어봤던 기억 때문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쉽고 재밌는 강의에 미칠 듯이 빠져들었다. 내 공부를 그렇게 했다면 우주 전체 수석도 너끈했을 것이다. 두고두고 기억될 고마운 선생님들을, 고등학교 졸업 십수 년이 지나, 교육 방송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조카에게 교육 방송에 숨겨진 보물들을 알려줄 생각에 신이 났다. 언제든지 달려가 비빌 수 있는 언덕을 만난 안도감에 겨울 방학의 문을 있는 힘껏 두드렸다. 앗!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너무 세게 두드렸다. 쾅쾅쾅!






윗글은 2021년부터 약 2년 동안 조카와 함께한, 입시 경험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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