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진짜? 네가? 왜?

아닌 밤중에 입시 10

by 오늘나

절망, 분노, 허무, 허망만 가득했던 조카의 겨울 방학은, 내 가슴에 시커먼 재만 가득 남기고 사라져 갔다. 암담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 재가 거름이라도 된 것일까? 그림 말고는, 모든 것에 무기력해 보였던 아이가 개학과 동시에 달라졌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서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눈에만 게을러 보였을 뿐, 어쩌면 아이는 나름대로 힘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잔소리할 힘도 없어서 거리를 두고는, 그걸 ‘믿고 기다렸다’라고 포장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너무 성급했을까?


믿고 기다리겠다는 말을 뻔지르르하게 해 놓고, 은근히 재촉해 대는 어른들의 성급함만 없다면, 아이들은 각자의 속도에 맞춰 성장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믿고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머리로는 이론서가 천만 권은 들어 있는 듯 빠삭한데, 천불 나는 마음은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그러다 결국 머리와 마음이 만든 불협화음이 폭발해 버리는 상황 말이다. 그 폭발이 남긴 아픈 상처를 보며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상황 말이다.


조카의 많고 많은 변화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출마 선언이었다. 햇살도 싱그런 봄날, 생각지도 못한 출마의 변을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고모, 저 이번에 반 부회장 선거에 나갈 거예요.”

“뭐? 진짜? 네가? 왜?”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아이에게 격려는커녕, 빛보다 빠르게 경망스러운 질문을 한가득 쏟아냈다. 하지만 내게도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조카는 개구쟁이 초등학생 때도, 한껏 진중해진 사춘기 때도 학급 선거는 심하다 싶을 만큼, 한결같이 칠색 팔색 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느닷없이 부회장 출마 선언을 하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건 마치 길을 가다 금도끼 은도끼를 안겨주는 산신령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내 품에 덥석 안기는 일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누가 부회장 선거에 나가보라고 한 거야?”

“아니요. 제가 하고 싶어서요.”

“진짜? 너 스스로 선거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네.”

“왜?”

“그냥요.”


아, 역시나! 이번에도 ‘그냥요’였다. 그동안 조카에게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그냥요’였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했었다. 그런데 여지없이 ‘그냥요’가 또 출현했다. 조카는 물어보는 족족 유행어를 내뱉듯, 랩을 하듯 ‘그냥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아버지의 ‘거시기’는 참으로 해석이 쉬운데, 조카의 ‘그냥요’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암호였다. 우주의 모든 기운을 모아서라도 풀고 싶을 만큼 아리송한 비밀의 언어였다. 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어차피 ‘그냥요’ 일 것을 알기에 궁금증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어쩌면 진짜로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어쨌건 섬세하고 내향성이 강함에도 무엇인가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는 자체로 기특할 뿐이었다. 그건 분명 아이의 성장 신호였기 때문이었다. 기왕이면 원하는 바를 얻으면 좋겠지만, 노력과 열망이 항상 결과와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도 의미 있어 보였다. 방학 내내 겨울잠 자는 ‘미련 곰탱이’처럼 지내는 모습에 속상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환희로 바뀌었다. 역시나 나는 새털보다 가벼운 존재였다.


후보는 조카를 포함해서 모두 2명이었다. 상대 후보는 무척이나 적극적이고 지도력이 출중한 여학생이었다. 서로 잘 모르는 학기 초라서 그런지 아이들 선거는 ‘공약’이나 ‘능력’보다는, 동성의 후보를 지지하는 분위기상 ‘성별’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상대 후보의 능력과 열정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 특성상, 사실 선거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과한 열정이 화를 불렀는지, 상대 후보가 부적절한 선거 운동으로 후보직을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무서운 ‘정치판’이 고등학교 교실에서도 벌어진 모양이었다. 어른이라는 거울을 통해 아이들이 무엇을 보았길래 ‘부적절’,‘ 사퇴’라는 단어가 고등학교 반 선거에 등장한 것일까? 조카는 의도치 않게 단독 후보가 되었고, 예상을 뒤엎고 부회장이 되었다. 역시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렇게 회오리치는 선거가 끝난 후, 사퇴했던 후보자는 공개 사과를 했고, 반 아이들은 그 사과를 받아주며 한바탕의 소란은 잘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마음 담아 사과하는 용기와, 그 진심을 받아주고 품어준 아이들의 관용에 놀랍고 감사했다. 못된 어른들의 뻔뻔함과 파렴치함을 배우는 대신, 옳은 길을 깨우친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고마웠다.





윗글은 2021년부터 약 2년 동안 조카(남)와 함께한, 입시 경험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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