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입시 14
중간고사가 남긴 상처는 몹시 깊고 아팠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마음의 힘을 빼고, 다가오는 하루를 맞이하고, 지나가는 하루를 흘려보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을 따라 중간고사의 상처가 조금씩 옅어지던 어느 날, 조금은 상기된 표정의 조카가 ‘미술 실기 대회’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냈다. 한 대학교에서 진행하는 미술 대회에 참가해 보라는 미술학원 원장님의 권유, 아니 결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험을 쌓기에 좋다는 이유였다.
“저도 그냥 분위기가 궁금해서 나가는 거예요.”라는 조카의 밝은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드디어 미술 대회 날! 경험이 제일 중요하다던 내 마음이 간사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혼자서 두 근 반, 세 근 반 설렌 것이다. 하지만 결과 발표일이 훌쩍 지나도 조카는 아무 말이 없었고, ‘비빌 언덕’처럼 든든해 보이고 싶던 나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미 조카의 낙담한 표정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의 어두운 표정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카의 속도 모르고 ‘은근히 기대했다가 막상 진짜 못 받으니까 실망했나?’라고 넘겨짚었다. 헛다리였다. 조카는 정말 경험을 쌓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에 나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뜨겁고 무거운 대회 분위기에 놀란 것이었다. 압도적인 참가 인원은 둘째 치고,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해하는 조카와 달리, 다른 학생들은 주제를 듣자마자 금세 구도를 잡고 잘도 그렸단다. 너무도 능숙하게 그려나가는 참가자들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 있지?’라고 놀라 기가 죽었단다. 엄청난 실력 차이에 주눅 들어 미완성을 제출한 것은, 덤이었다.
조카가 미술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부터 남동생 부부와 내가 한마음으로 걱정하며 기다렸던 손님이 있었다. 그림 실력이 멈칫멈칫 주춤거릴 때 등장할 슬럼프였다. 솔직히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지만,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음에도 채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와서는 요란하게 존재를 과시하니, 당황스럽고 야속했다. 조카는 그야말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갔고 결국 최후의 말까지 뱉었다.
“고모, 저 미술을 괜히 시작했나 봐요. 아무리 해도 늘지도 않고, 미술 대회 가서 보니까 잘 그리는 애들이 정말 너무 많아요.”
중간고사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미술 대회 상처까지 덧입혀져 버렸다.
아이의 표정은 더욱더 어두워졌고, 치유는커녕 또 다른 상처까지 보태졌다.
“고모, 학원에 1학년 후배 한 명이 새로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이제 막 시작했다는데 정말 잘 그려요. 저보다 훨씬 잘 그려요.”
“그래? 근데, 그 애가 잘 그리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조카의 말을 이해했으면서도 모르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어야 했다.
“저보다 어리고 늦게 시작했는데도 속도도 빠르고 잘하니까, 제가 조금·······.”
“조금 뭐?”
조카는 멋쩍게 웃었다.
아이는 우리가 두려워하던 또 다른 손님, ‘비교’까지 살뜰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곁눈질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주길 바랐는데, 조카는 여지없이 비교라는 늪에까지 빠져 자신감을 잃어갔다. 흡사 냉동실에 잘못 들어갔다 나온 상추처럼 물러터지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아직 시간이 많다고 안심시켜 주는 부모의 격려도, 그림을 시작한 지 겨우 5개월이고, 사람마다 능력과 속도가 다르다는 나의 조언도 아이의 마음엔 온전히 닿지 못했다. 이런저런 말로 용기와 응원을 떠먹여 주는 것은, 언젠가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장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결국 우리는 아이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저 따뜻한 시선과 밝은 미소로 온전히 기다려 주기로 했다. 입시를 위해서는 일분일초가 아까웠지만, 멀리 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스터디 카페에서 만나면, 평소처럼 실없는 농담도 하고 간식도 먹으며 정해진 과제를 확인할 뿐, 그림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다. 당장 미술학원을 그만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힘들고 의욕이 없어 보임에도, 그럼에도 묵묵히 학원에 다니는 아이에게서 이미 충분한 노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분명 누가 보아도 비상사태인데, 내 마음이 평온했다. 원하지 않는 손님들의 존재가 분명 불편했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동요도 없이 평화로웠다. 주인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언제 올지 알려주지도 않고, 느닷없이 나타나 당황케 하고 자신감마저 앗아간 손님들이었지만, 마냥 밉기만 하진 않았다. 그 손님들이 줄 선물 때문이었을까?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설 기회라는 선물 말이다. 그 기회를 통해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더욱 단단히 만들어 갈 선물 말이다. 왠지 조카가 그 선물을 잘 받아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나보다. 저벅저벅 코 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를 준비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지만, 무섭지 않았던 이유가 말이다.
윗글은 2021년 11월부터 약 2년 동안 조카(남)와 함께한, 입시 경험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