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만큼 더 달아지나 봐!

아닌 밤중에 입시 15

by 오늘나

밥 먹고 돌아서자마자, 바로 다음 밥때가 버티고 있는 기분이 이럴까? 중간고사 끝난 지 엊그제인데 돌아서니 바로 기말고사였다. 하지만 여전히 평온한 척 절규하며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기말고사는 무리였다. 이미 충분히 복잡한 머릿속에 국어나 영어 같은 시험 과목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시작한 입시니, 공부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모, 기말고사 일정표 나왔어요.”

“벌써?”

시험의 연속인 생활은,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숨이 찼다.

“이번 기말고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글쎄요. 중간고사를 완전히 망쳤으니까 90점 이상은 맞아야 하지 않을까요?”

턱없이 높은 점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힘겨운 의무감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시간이 부족한데, 가능할까?”

“그래도 일단 목표는 높게 잡아야죠.”

“아냐! 꼭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우리 이번에는 저번 중간고사보다 1점 이상 올리는 거로 하는 건 어떨까?”

“네? 지금 저 무시하세요? 겨우 1점 올리기가 무슨 목표예요?”


조카는 내가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겉만 뻔지르르한 이상적인 목표보다는, 볼품없어 보여도 속이 알찬 현실적인 목표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이미 바닥을 치다 못해 땅굴 후미진 곳에 널브러진 아이의 자신감을 조금이라도 일으켜 세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중간고사보다 1점 이상 올리기’라는 목표를 선택했다. 초라해 보일 수 있었지만, 마음만은 한껏 진지했다.


하지만 촉박한 시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한 없이 풀 죽은 조카의 의욕은 도무지 살아나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 지친 마음에 슬금슬금 짜증이 더해지고 있었다. 뭔가 조금만 삐끗해도 바스러질 듯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조카가 약속 시간보다 늦게 스터디 카페에 온 날이었다. 시간까지 안 지키는 불성실함에, 결국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모든 ‘참을 인(忍)’을 내던지려던 순간, 분홍 딸기 우유 한 개와 달콤한 빵 한 봉지가 내 앞에 놓였다. 지각의 이유였다. 자기를 위해 애쓰는 고모를 위해 학교가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편의점에 가서 사 온 것이었다. 용돈도 넉넉지 않을 테고, 마음도 편치 않을 텐데, 내가 또 섣불렀다.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하면 돼.”

“네, 시험 끝나면 전화할게요.”

조카는 그렇게 기말고사를 시작했고, 약속처럼 시험이 끝나면 항상 전화를 주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목표 성공 100%라는 기적 아닌 기적을 이루었다. 사실 중간고사보다 낮은 점수를 맞는 것이 더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조카는 나름의 성취에 만족했다. 작전 대성공이었다.


슬럼프와 비교라는 덜미에만 잡히지 않았어도 시험 결과는 엄청났을 거란 생각에 조금, 아니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서로 맘만 상할 것이 뻔했다. 그저 아이에게 배움이 있었기를 바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더구나 반갑지 않은 손님들의 때 이른 방문이 조금은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입시를 코앞에 두고 왔다면, 그건 더 아찔하니까 말이다. 고맙게도 조카는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했고, 그림도 제 길을 찾기 시작한 것 같았다.


“고모, 이젠 선도 잘 그려지고, 구도 잡는 것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그동안 선이랑 구도가 어려웠던 거야?”

“네, 원장님이 도와줄 때는 어느 정도 되다가, 혼자 하려면 안 됐거든요.”

“그래? 근데 선이랑 구도를 잘한다는 게 뭐야? 말이 어려워. 네가 그린 그림으로 설명해 줘 봐.”

“제 그림으로요? 에이, 아직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히히”

“그러지 말고, 보여줘 봐. 궁금해. 고모보다 훨씬 잘 그릴 거 아냐?”

“고모도 배우면 잘 그리실걸요.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면서요?”


겸연쩍어하는 내 앞에, 조카의 전화기 속 앨범이 놓였다. 그간 아이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수없이 그어진 가로세로 선들, 삼각형 사각형의 평면 도형과 온갖 입체 도형, 금속 질감이 살아있는 음료수 캔, 거친 질감의 나무토막, 너덜너덜한 가죽이 만져질 것 같은 낡은 축구공 등이 미술관 벽면을 메우듯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조카 전시회의 도슨트라도 된 듯 마음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졌다.


‘힘든 시간을 잘 건너고 있구나! 꽃과 나무가 비바람을 맞으며 더욱 아름답고 단단해지듯, 아이에게도 비바람이 필요했구나!’ 억지로 우산을 씌워주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갑자기 기특해졌다. 조카 따라 내가 무럭무럭 크고 있는 이 기분은 뭘까?




윗글은 2021년 11월부터 약 2년 동안 조카(남)와 함께한, 입시 경험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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