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겨울이 지나고 6살이 되었던 것 같다. 진주에 있는 고려병원 앞 작은 보조기 상사에 아빠와 엄마가 나를 안고 들어갔다. 백발의 할아버지와 아저씨가 우리를 맞이했다. 아저씨는 백발 할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인상 좋은 백발 할아버지는 책상에 앉아서 우리와 대화를 나눴고, 아저씨는 여러 의족을 만져가면서 아빠와 엄마에게 설명했다. 아저씨가 하얀 붕대를 물에 적셔 내 다리를 친친 감았고, 조금 지나니 붕대가 굳었다. 그 딱딱하게 굳은 붕대는 의족을 하게 될 내 다리를 본뜬 석고본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제 의족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엄청 어린 여자 아이의 작은 발은 딱딱하고 정교하지 않은 허술한 모양의부목 같은 가짜발로 변할 것이다. 영원히 한쪽은 이렇게 내발이 아닌 딱딱한 가짜 발로 걸어야함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두꺼운 의족 양말을 신고 벗었다가 의족을 꼈다 뺐다 해보고, 절둑거리며 걸어 보기도 하고,여러 번 진주를 오간 이후 어느새내 새로운 다리가 생겼다.
엄마가 같은 동네에 살았던 친할머니께 다녀오라고 했다. 다리를 다친 이후 처음으로 걸을 수 있었던 의족을 차게 된 날 나는 신이 난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으며 할머니께 갔다. 활동량이 엄청 많았을 어린아이에게 오랜만에 걸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할머니집 대문 밖 공터에 이미 나와 있던 할머니는 멀리서 걸어오는 나를 보며 주저앉으셨다. 그리고 내가 할머니께 다가가자 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내 다리를 만지며 오열하셨다.
평소에 다정하지 않았던 할머니가 우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엄마가 할머니께 가 보라고 해서 온 것인데 할머니가 왜 갑자기 슬프게우는지 이해를 못 했다.한참을 울던 할머니를 두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무뚝뚝한 할머니였을지라도 태어날 때부터 돌 때까지 같이 살았던 손녀가 하루아침에 발목을 잃었으니 얼마나 믿기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다치던 날 본인이 돌봤더라면 다치지 않았을까라며 국민학생이 된 내게 몇 번씩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른들에겐 나를 보는 순간순간이 후회로 기억되는 5살의 그날이었나 보다.
6살이 되면 그렇게 가고 싶었던 유치원을 다닐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아직 유치원을 가지 못 했다. 우리 동네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은 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고, 나보다 어린 동생들도 유치원에 가는데 나만 못 가는 것이 서러웠다. 의족도 맞춰서 이제 걸을 수도 있는데 왜 아직 유치원을 못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심심한 것은 병원이나 집이나 똑같았다.
의족을 하기 전에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로 엄마와 언니 동생에게 온갖 짜증을 부렸다. 아빠는 무서웠기에 아빠 앞에서는 얌전한 척을 했다. 언니는 짜증을 부리는 나에게 어떤 것이든 양보해 줬다. 말 못 하는 동생은 내가 짜증을 부리면 무서워했다. 아직 어린 동생은 점점 내 말에 꼼짝을 못 했다.
붕대 같은 양말을 여러 겹으로 덧대어 다듬이방망이 같은 다리에 끼워 신고 의족을 차는 일은 어린 6살에게 힘든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침에 의족을 찰 때면 쉽게 의족 양말을 신을 수 없던 나는 엄마에게 울면서 짜증을 내었다. 의족 안 쪽과 내 뭉뚝한 발 사이의 틈이 작기에 양말을 조금만 잘못 신어도 틈이 꽉 껴서 걸음을 디딜 땐 아프거나 불편했다. 양말과 의족을 뺐다 꼈다 반복하다 잘 안 되면 엄마는 표정을 없앤 얼굴로 말없이 양말을 신겨주셨다.
평생을 딸이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그거 한번 엄마가 돼서 못 해 주겠냐마는 아니 백번이고 해 주고 싶었겠지만, 내가짜증을 내고 울고 해도 엄마는 쉽게 해 주는 법이 없으셨다. 내가 하다가 하다가 안 되면 그때 엄마의 손을 빌려 주셨다. 그렇게 불편한 의족 착용을시작하게 된 여자 아이는 집에서만 지내는 거의 똑같은 평범한 일상이어서인지 6살의 기억이 거의 없다. 의족을 적응하던 1년의 기억은 없지만 매 순간을 함께했던 나의 가족들은 나를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엄마에게는 불쌍하고도 고약한 딸이자, 언니와 동생에게는 고집불통 형제, 아빠에게는 때를 쓰는 울보 아이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