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 그 소중함에 대해서
남편과의 부부싸움을 통해 깨닫게 된, 주부가 힘든 이유
그저께 부부싸움이 있었다. 그래, 이 얘기를 안 하려고 빙빙 돌리고 또 돌렸지만 어쩔 수 없이 고백한다. 부부싸움을 했다. 가장 큰 원인은 '긴장감의 부재'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에 대한 '긴장감의 부재' 나와 남편은 긴장감이 사라졌으며 아이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며 사는 결혼 11년 차 부부이다.
매일 저녁이 다가오면 나는 저녁메뉴를 고민한다. 뭘 먹어야 하는가. 내 깊은 고민에 대해서는 이미 온 가족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 가족은 누구도 반찬타령을 하지 않으며 늘 무엇을 준비하든 한식이기만 하다면 (한식만 좋아한다) 군말 없이 잘 먹어주기에 내게 한 번도 '오늘 메뉴가 뭐야?'라는 위험한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먹기만 한다.
그러므로 밥상을 차리기 전까지 메뉴에 대한 고민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된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어야 마음속 만족감이 80~90프로 차오를까. 채운 배를 두드리며 한동안 넋을 놓고 티브이를 바라본 다음, 숙제에 집중할 수 있을까. 부족한 미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매우 간단한 문제일 수 있지만 내 고민은 한결같이 깊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름에 빠지고 만다.
어쨌든 그날의 메뉴는 삼겹살이었다. 새 밥에 부추오이무침, 파절이 같은 반찬을 만들고 청상추를 씻어서 먹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기침을 한다. 피곤하다고 한다. 소파에 누워서 잘 수 있게 이불까지 덮어준 다음 분주한 준비를 이어가던 도중 문득 냉장고에 있는 콩나물이 떠올랐다. 콩나물국이 주는 위로가 떠올랐다. 시원한 국물이 아픈 목을 넘어갈 때 받는 위로.
결국 콩나물국까지 끓이기로 마음먹었다. 육수를 우리고 콩나물을 씻고 굵은소금도 친 다음 마지막엔 쫑쫑 썰은 대파까지 넣었다. 마지막 한방을 위해 조미료 반숟갈은 필수였다. 그렇게 준비를 마쳤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매일을 하루처럼 출근하는 남편을 위한 배려까지 준비완료.
그렇게 밥상이 차려졌다. 반찬 하나하나가 내 고민의 결과였다. 불과 십여분, 길면 이삼십 분 안에 바닥이 나겠지만 한결같이 고민한 내 창작물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잘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하며 식사를 마쳤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설거지.
남편은 저녁에 골프를 치러 간다. 그의 루틴 중의 하나이다. 마치 놀이동산 가는 어린애처럼 골프장을 오가고 있으므로 절대로 나는 그 마음을 나무랄 생각이 없다. 오히려 좋아하는 취미를 애지중지 키우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마음과 싸우는 '설거지'라는 의무이다. 결혼할 당시 우리의 약속은 내가 밥을 하면 그가 설거지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열심히 고민해서 창작물을 만들어내면 뒷정리는 그가 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가 설거지를 안 하는 날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끌다가 골프장으로 내빼는 날들이 늘고 있다. 더군다나 삼겹살을 구웠던 날은 배려의 산물, 콩나물국까지 탄생한 날이었다. 그런데 그는 홀랑 도망갈 계획을 꿈꾸는 중이라는 것이 내 눈에 훤히 보였다. 배려는 콩나물국에 밥 말아먹듯 사라졌다. 결국 분노가 조금씩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씩씩대며 기름진 바닥을 닦아냈다. 그는 엉거주춤, 설거지를 하는 척하며 싱크대 앞에 섰다. 대강대강 닦아내는 그릇들. 삼겹살을 먹어본 세상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어떻게 그릇들을 닦아내야 하는지. 그 비장한 순간을 감히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 그릇에서 삼겹살향을 맡고 싶지 않다면 얼마나 박박 닦아야 하는지를.
그런데 그는 설렁설렁 밥그릇을 닦아댔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엔 기름이 안 묻어서 괜찮아.'
이글이글 끓고 있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되듯, 화산재가 튀어나오듯 내 눈에서 레이저가 마구 발사되기 시작했다. 그걸 피하듯 그는 걸레를 빨던 내게 '다녀와서 설거지할게요.'라고 나직이 읊조리곤 골프장을 향해 내뺐다. 이제 남은 건 삼겹살 냄새가 예상되는 그릇들과 기름진 바닥, 그리고 나, 한쪽에서 눈치를 보며 숙제하는 우리 꼬마가 다였다.
나도 모르게 그릇을 다 집어던지는 상상을 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실체를 분명히 마주하고 싶었다. 내 남편인가. 왜 나는 매일 저녁메뉴를 힘겹게 고민하고 밥상을 차리고 치우기까지 도맡아서 기쁘게 해야 하는 거지? 왜 나는 숙련되면 숙련될수록 더 많은 일을 말없이 짊어져야 하는 거지? 오, 이건 회사와 똑같네? 일을 잘할수록 더 많은 일이 주어지며 그 결과는 누군가가 채가는 x 같은 상황??!!!!!
우리는 격하게 싸울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골프채를 휘두르며 골프장에 있었으므로. 대신, 나는 압력밥솥의 추에게 화풀이를 하느라 불쌍한 추를 싱크대 쪽으로 던지다가 그만 창문을 깼다. 그릇을 다 깨고 싶은 마음이 우리 집 주방 창문 한 개를 깨버렸다. 지금까지 끓던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 대신 당혹스러운 마음이 훅 덮쳐왔다. '앗, 이건 아닌데...'
깨진 창문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이건 실수였다. 그리고 어쩌면 경고였다. 그런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면 못쓴다는 경고. 화가 났을 때 물건을 집어던지는 걸 그만하겠다는 숱한 결심들이 와장창 함께 깨지는 순간이었다. 유리창을 붙이고 싶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깨진 유리창은 절대로 다시 붙지 않는다.
남편은 더 신이 났다. 괴상망측한 성격의 주인공이라며 입을 놀려댔다. 그 입을 어떻게든 멈추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내 잘못을 시인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돈은 좀 썼지만 운 좋게 성실하고 재빠른 유리가게 사장님께 전화를 건 덕분에 유리창은 곧바로 교체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가. 어쨌든 유리창은 이제 그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 그대로다.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면 나는 어떡해야 하는 거지? 이 모든 걸 곁에서 지켜본 아이는 말했다. "엄마, 절대로 설거지해주지 마." 마치 내가 하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빠와 3일 정도 거리 두기를 하란다. 아이의 위로 덕분에 조금 마음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회사는 그만두면 되는데 집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화기애애하게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음식 냄새를 맡으며 설렁설렁하는 그의 설거지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아니면 모든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도 괜찮아야 할까.
답은 아직 모르겠다. 그냥 기다려볼 생각이다. 지금은 분노를 그렇게 표출하면 안 된다는 걸 가르쳐준 유리창을 안심시킬 생각이다. '나는 너를 헤칠 마음은 없어...' 단지 화가 났을 뿐인데.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상기시킨 날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첩첩산중을 어찌 헤쳐나갈지 여전히 고민하는 중이다. 주부의 스트레스는 저녁메뉴가 아니라 가족이 그녀를 대하는 '긴장감의 부재'이다. 이제야 엄마에게 늘 뿜어져 나오던 '화'를 이해할 것 같다. 이 긴장감을 어떻게 다시 불러와야 할까. 정말 가출을 해봐?? 상상만 수차례, 오늘도 나는 해답을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