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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 Apr 22. 2023

사과하지 않는 이유  

왜 사람들은 사과하는 순간 진다고 느낄까

작년 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무더웠던 여름이 끝나고 그윽하게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우리 아이는 그 해 봄부터 진행해 오던 운동 모임 친구들이 노는 자리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안의 누군가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그 아이만 만나고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갔다가 여러 아이들이 우르르 놀고 있는 자리에 휩쓸렸던 걸로 기억한다. 모임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평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으로 간식을 사러 자리를 떴을 법도 한데 그날은 잠시 있다가 떠날 생각이었기에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럿이 모여 즐겁게 대화하는 자리, 부담 없이 음료수 한잔 과자 한 봉지 놓고 아이들이 편안히 놀 수 있도록 보호자들이 모여 지켜보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것 아닌 얘기에 다 같이 웃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정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이런저런 사소한 수다에 빠져들었던 나처럼 내 아이도 친구들과의 놀이에 빠져 정신없이 놀고 있었다. 공 하나를 바라보고 여럿이 달려들어 뛰거나 팀을 나누어 족구를 하거나 하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놀이였다. 웃는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고 생각했으므로 아이에게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채근하지 못했다.


잘 논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갑자기 돗자리에 앉아있는 내게 달려왔다. 몇몇 친구들이 뒤를 따랐다. "엄마, ㅇㅇ가 자꾸 나한테 넌 빠지래!" 평소 다정해 보이던 한 아이가 우리 아이에게 게임을 하던 도중 반복적으로 '너는 빠져'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에이, 네가 뭘 잘못했겠지~" "아니에요, 이모. ㅇㅇ는 잘못한 것 하나도 없는데 자꾸 빠지라고 했어요!" 아이들의 증언이 뒤를 이었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평소의 나는 이렇게 문제가 발생하면 상대편 아이의 입장을 먼저 다 들어주고 우리 아이의 말을 들어준 다음 서로 화해를 유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이방인이었다. 예전부터 나머지 엄마들과 아이들은 자주 모이는 듯했다. 모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 앞에 낯선 존재인 내가 서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내 아이의 억울함을 덜어줘야 했고 그 아이의 말을 들어봐야 했다. 평소 그 아이를 자주 봐왔고 내 딴엔 다정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했기에 "ㅇㅇ야, 왜 그래~"라고 아이의 말을 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나를 피했다. 수다에 심취했던 아이의 엄마가 그제야 "무슨 일이야?"라고 말하며 나를 제지하고 자신의 아이를 한구석으로 데리고 가버렸다.


우리 아이는 여전히 속이 상한 상태였다. 내 가슴 한구석이 아파왔다. 신기하게도 아이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나는 내 신체 일부가 정말 아파오는 착각에 빠진다. 심장의 일부에 타박상이라도 입은 듯 통증이 느껴지곤 한다.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내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의 증인이 되어준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봤다. 들은 얘기를 한 번 더 들으며 한동안 그 아이와 그 엄마를 기다렸다.


그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그냥 그대로 놀도록 풀어주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아이들 노는데 어른이 끼어들면 안 되는 거예요. 이제 아이들이 자랐으니 그 안에서 스스로 사회성을 기르도록 엄마는 빠져야죠." 어이가 없었다. 그 말에 대꾸하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이 말에 다들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던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심했다. 아니, 무심한 척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집단이 공고하려면 그 안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친절해야 하지만 이방인에게는 그 정도의 텃세가 필요하다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순식간에 아이를 과보호하는 엄마로 전락했다. 영리한 우리 아이는 공부만 강요하는 엄마로 인해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갇혀사는 사회성 부족한 아이로 매도당한 것만 같았다. 기가 막혔지만 일단 아이의 기분이 풀렸고 다른 아이들도 함께 놀고 있었기에 그 아이는 계속 눈여겨보기로 하고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교 후 학교 앞 축구경기장에서 축구를 하던 아이에게 같은 일이 벌어졌다. 또 같은 녀석이었다. "야, 넌 빠져!" 집요하게 아이의 뒤를 따라다니며 빠지라고 텃세를 부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증인이 되어준 아이 친구가 말했다. "이모, ㅇㅇ이는 잘못한 것 없는데 쟤가 갑자기 빠지라고 했어요." 두 번째였다. 이번엔 엄마 대신 할머니가 있었다. 물어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아이는 그렇게 수컷의 본능을 뽐내는 중이라는 걸 이젠 확실히 알았다. 멀리서 아이에게 먼저 눈빛을 보냈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하고 다니는지 이제 다 알아.' 그리고 말했다. "네가 그런 말을 자꾸 하면 친구가 속상해해. 그러니까 이제 그러지 말아 줄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할머니는 서둘러 손주를 데리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할머님은 손주를 괴롭힌 나쁜 엄마로 내 얘기를 이곳저곳에 하셨고 그 말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전해졌다. 다시 한번 어이없는 순간을 경험했다.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맥주 한 캔으로 잠재웠다. 더 대응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일련의 행동을 통해 깨달았으므로.


그리고 최근에 다시 한번 그 아이의 텃세와 버릇없음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번엔 규모가 제법 커져 있었다. 폭력성이 추가되었다. 누군가를 때린 걸로 확인되었고 가해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인 '장난'이라는 말이 섞여있었다. 강도가 세질수록 이기심과 묵인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그 위에 교활함을 덧입히는 중이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띈 것은 이제 아이가 거짓말을 잘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거였다.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며 질문이 생겼다. '그 아이는 지금 수컷들의 권력싸움에서 점점 강해져 가는 걸까?' 그 엄마가 최초에 내게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그 아이는 사회성을 키우느라 못된 짓도 해보는 거였고 그걸 부모가 일일이 모두 사과하고 교정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피해자인 우리 아이에게도 사과는커녕 도리어 사태파악에 나선 엄마를 과잉보호하는 사람으로 매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엄마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중이었다. 진정한 권력은 서로가 동의하는 가운데서 탄생하는 것이므로 일방적인 권력은 무너지게 마련이라는 진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으로 권력을 다질 것이 아니라 친구들로부터 인정받는 무언가를 했어야 했다. 칭찬을 통해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노력하는 기쁨을 느끼면서 성장해야 하는데 부모는 아무 노력도 없이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아이에게 거듭 알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졸개를 어둠의 세계에 내보내는 건달 두목처럼.


잘못된 가치관이 문제를 부르고 있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고칠 수 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는 걸 수도 있다. 집단 안에 숨어만 있으면 문제없다는 믿음이 이미 단단히 자리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과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다. 사과하길 바랐던 마음도 빛이 바랬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애당초 신뢰가 없던 마음이었기에 상대방에 대한 배척으로 사회성이나 권력구도가 완성될 수 있다는 믿음이 가능했던 것 같다.


정말 사과하면 지는 것일까. 사과는 나를 오픈하는 과정이다. 내가 잘못했음을 인정할 줄 아는 당당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도 가치 있는 사람임을 확인하는 행동이다. 아이에게 세상이 어둡고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생각보다 떳떳하게 나를 밝히고 앞으로 나아갈 때 추진력을 실어줄 어른들이 더 많다고 말해주고 싶다. 잘못하면 사과하고 고치면 된다고, 잘못을 알고도 꽁꽁 숨기면서 어두운 구석에 자아를 가두는 대신 비바람에 상처받더라도 양지바른 햇살 아래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들처럼 스스로를 사랑하고 관찰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내 아이를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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