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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다 Jul 29. 2023

나에겐 다운증후군 친구가 있었다

나를 키운건 8할이 그 아이였다

3학년 때 처음 만났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엄마의 발령지를 따라 전학 온 남학생이었고, 실제 나이는 나보다 3살인가 4살쯤 많다고 했다.

일반 학교에 특수반이나 특수 교사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부담임이나 보조 선생님 개념도 없던 시절이다.

반의 평화와 다수의 학습권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희생해야 했다.

선생님은 공부 잘하고 야무진 여학생 3명이 그 아이를 케어하도록 했고, 나는 그 중 한명이었다.


난리도 아니었다.

수업 시간 중에 도망 치는건 예사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 셋이서 잡으러 다녀야 했다.

어떤 날은 7교시 중 3시간 이상 수업을 못듣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 담임 선생님은 우리만 모아두고 보충 수업을 시켜주셨다.

사실 3학년 교육 과정이라는게 어려울 게 없고 나를 제외한 두 친구는 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보충 수업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그 시간은 아마도 담임 선생님의 양심에 따른 나름의 사죄와 보상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내 학교 생활을 우리 엄마도 알고 있었지만 항의하지 않으셨다.

그 시절 담임 선생님은 학부모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 밖의 상황이었다.

실제로 다른 두 친구 어머니는 이 상황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전달하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어려운 친구는 도와야 한다”고 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 아이를 돕는 일이 ‘당연한 내 일’이 되었다.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의 난이도는 점점 올라갔다.

무조건 돕고 받아주기 보다,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통제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가 더 편하니까.

10살짜리 여자애가 중학생 쯤 되는 지적 장애 남자애를 통제한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 전학와서는, 사라졌다 하면 우리 반 교실이 있는 건물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찾아서 잡아오는데 30분이면 족했다.

그런데 학교 지리가 익숙해 지는지 행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다.

1학기가 지나고 나서는 학교 밖으로 나가는 일도 생겼다.

결국 정문과 후문 앞에 있는 문구점 사장님께 감시를 부탁드려야 했다.


이걸 겪으면서 이 아이에게도 인지 능력과 학습 능력이 있다는걸 알았다.

장애라는 것이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느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하는 마음이 생겼다.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고. 10살짜리 여자애가 할 수 있는건 다 했다.

쉬는 시간에 나가면 시간 맞춰서 데리고 들어와야 했지만, 그래도 수업 시간에 갑자기 나가는 행동은 사라졌다.

수업 시간을 지키게 된 이후에는 한글 공부를 도와줬다.

말이 도와준거지, 거의 관리 감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너는 남들보다 느리니까 다른 애들 10번 쓸 때 너는 100번 써야 해.”라고 하면서 가나다라를 100번씩 쓰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그 아이에게 했던 행동은 가스라이팅이었다.

그 아이와 나 사이의 정신 연령이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면 명백한 정서적 아동학대였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걸 아동이 했다는게 우습긴 하지만.


그러나 어른들이 보기엔 내가 꽤 잘 했던 모양이다.

차마 그 다음 해까지 같은 반으로 붙여 놓을 수 없으셨던 것 같지만, 5학년이 되어서 다시 한반이 되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고맙고 미안하다고, 그 아이를 올해도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아, 나는 선택 되었구나.


담임 선생님이 그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에 3학년 때보다는 선생님의 협조 수준이 높았던 점은 좋았다.

그러나 난관이 더 컸다.

도대체 이 자식은 어떤 4학년 생활을 보낸건지 3학년 말보다 모든 면에서 후퇴해 있었다.

행동반경이 넓어졌다는 사실만 여전했다.

게다가 덩치도 엄청 커졌고, 사춘기도 온 것 같았다.


5학년에 다시 만나서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자꾸 바지 속에 손을 넣어 성기를 만지는 행동을 어떻게 제어하나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차마, 아니 12살 여자애한테는 당연히 어렵고 진저리 쳐지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아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어떠한 성적인 의도 없이 하는 행동이라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장애가 있던 것이지 바보는 아니었다.

한번은 수업하기 싫었던지 쉬는 시간에 도망쳐서 들어오질 않아 찾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러다 복도 끝에 있는 그 아이를 발견하고, “야, ooo!”하고 이름을 불렀는데, 글쎄 이 자식이 남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게 아닌가!

거기 들어가면 내가 못 쫒아온다는걸 아는거다.

그 말은 나와 자기가 다른 성별을 가지고 있다는걸 아는거다.

최소한 여자는 남자 화장실을 쓰지 않는다는 학습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 후로 성기를 만질때마다 “뭐하는거야. 여기 여자애들도 다 있는 교실인데! 손 빼! 화장실 가서 씻고 와!”하고 지시했다.

몇달 걸리긴 했지만 제어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교실에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걸 선생님도 들으셨을테니 집에서도 훈련시키셨으리라 생각했다.


사춘기가 온 다운증후군은 정말 힘들었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나한테 그 아이는 항상 힘들었으니까.

사실 그 아이가 사춘기인줄도 몰랐다.

이제서야 돌이켜 생각해보니 ‘사춘기였구나’ 하는 거다.

그래서 였을까.

2학기 어느날, 여전히 가나다와 받침없는 단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 아이는 내 학습 압박이 지독히도 싫었던 모양이다.


3학년 때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 아이가 나를 때렸다.

15살? 16살쯤 되는 청소년이 12살 된 여자애의 어깨에 주먹을 휘둘렀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로 세게 맞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람을 때려 봤다.

엄마는 늘 나에게 “먼저 때리지 말아라, 그러나 맞고 있지도 말아라”고 하시긴 했다.

그런데 그래서 때린건 아니다.

화나서 때린 것도 아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그 순간 나는 그 어느때보다 이성적이었다.

그때 나는 아마도 ‘이 새끼봐라, 맞아봐야 말을 듣지, 니가.’ 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홧김에 한번 휘두른 대가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자신의 엄마인 담임 선생님이 오셔서 나를 말릴 때까지 말이다.


그날 선생님은 나를 따로 남겨서 이야기하셨다.

미안하다고도 하시고 고맙다고도 하시며, 그래도 나쁜 의도를 가지고 때린 것은 아니라며, 나에게도 친구를 그렇게 때리면 안된다고 하셨다.

늘 말 잘 듣는 아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반박했다.

안맞아봐서 아픈 줄 모르는거다, 저도 다른 친구들은 한번도 안때려 봤다, 도장에서 대련하다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기 때문이다 등등…

사실 선생님을 더 이상 나에게 뭐라고 말을 못하셨다.

아마도 죄책감이 크셨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가 길지 않은 인생 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다.

그 아이를 때렸던 것.

그것이 사실은 반격이나 보호가 아니라, 내가 그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휘둘렀던 것.

엄마가 “맞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건, 타인이 나에게 악의를 지속하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의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아이는 악의를 가지고 나를 때린 게 아니었다.

내가 어른이고, 그 아이가 사춘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내 행동은 달랐을 거다.


나와 남편은 많은 것이 다르지만, 체벌에 대한 교육관만은 같다.

우린 둘다 체벌이 있는 학창생활을 보냈기 때문에, 무서운 학생 부장 선생님이나 체육 선생님을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들이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체벌의 효과는 공포였고 그래서 말을 들었으며, 그 반작용으로 체벌하지 않는 선생님을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생긴다.

우리 둘은 체벌이 근본적인 솔루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날 내가 그 아이를 때린 것은 체벌이었다.

그 결과, 그 아이는 나를 무서워했고 확실히 말을 잘 듣게 되었다.

나와 함께라면 하교 후에 그렇게 싫어하던 미용실에 가서 펌을 할 수도 있게 되었고, 받침없는 단어도 하루에 100번씩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가 나에게 느낀 감정은 공포였고,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반전은 없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요즘 같은 시국에 이런 말을 하기 무척 조심스럽지만, 나는 장애-비장애 통합교육 찬성론자다.

내가 그 통합교육의 수혜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와 함께 한 시간동안 내가 익힌 커뮤니케이션 스킬과 문제해결력, 조직 운용력, 멘탈 등은 내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다운증후군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었고, 사춘기 또래를 이해하는건 너무나 쉬웠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어울리던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었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힘들었던 기억이 없다.

내 힘으로 왕따 상황을 해결하고 친구들에게 사과를 받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화해했지만 지금까지 연락을 하진 않는다.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부차적이다.

그 아이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다양성‘과 ‘포용력’이다.

그게 삶을 대하는 태도에 상당한 여유를 준다.

지금 생각해 봐도 말이 되나 싶을만큼 희생해야 했고 피해를 본 경험이었지만, 긴 시간 지나고 보니 내가 얻은게 더 많았고 더 귀했다.

오히려 그 아이는 피해자였다.

사회 적응이라는 이유로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폭행을 당했는데도, 사회와 어른, 심지어 부모조차도 상황을 용인했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변했을까.

나는 덕분에 더 편하고 잘 살고 있는데, 그 아이도 그럴까.


우리 모두는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그러니 당연히 누군가는 내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행복하고 더 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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