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사로 감정을 배웁니다 1.

무의욕(無意欲)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구씨와 미정의 대화

by 단비

무의욕(無意欲)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구씨와 미정의 대화


다음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자경(배우 손석구)과 염미정(배우 김지원)이 나누는 대화이다. 사람이 의욕을 잃을 때, 무엇을 적극적으로 할 의지나 욕구를 갖지 못할 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 이보다 정확하게 짚을 수 있을까? 무기력하고 침울한 일상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은 각자가 느끼는 무의욕(無意欲)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구자경(배우 손석구): 괜찮을 땐 괜찮은데, 싫을 땐... 눈앞에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말을 하면 더 싫어.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야 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내야’ 하고. 뭐라고 말해야 되나, 생각해 내는 일 자체가... 중노동이야.

염미정(배우 김지원): 나도 그런데. 하루 24시간 중에 괜찮은 시간은 한... 한두 시간 되나. 좋은 시간도 아니고 그냥 괜찮은 시간이 그 정도, 나머진 다, 견디는 시간...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신나서 뛰어노는 애들 보면, 그 어린 나이에도 심난했어요. ‘뭐가 저렇게 좋을까, 난 왜 즐겁지 않을까...’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쓸데없이 허비되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길까... 80년 생을 8년으로 압축해서 살아버려도 하나 아쉬울 것 없을 것 같은데. 하는 일 없이 지쳐...


사람이 싫을 때, 자동적으로 노동이 시작된다.

상대의 눈과 마주치지 않게 시선 둘 곳을 찾아야 하고,

상대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위치로 동선을 짜야 한다.

그리고 진짜 어려운 건, 그 사람의 말에서 의미는 걸러내고 소리만 흘려 듣는 일이다.

말 그대로 귓등으로도 안 듣기, 이건 오직 실전 경험으로만 쌓을 수 있는 거여서 어느 정도 숙련되기 전까지는 여간 에너지가 소모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냥 노동이다.


싫은 사람과 말을 '해내야' 할 때, 그때부턴 진짜 중노동이다.

싫은 티가 너무 나서도 안 되지만 호감으로 느껴져서도 안 된다.

많은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지만 뿌루퉁 부어 보이면 트집 잡히기 십상이다.

길게 말하진 않아도 적당한 어절 수는 채워야 다시 되묻지 않는다.

개인적 신상에 관심을 두기 전에 주변 겉도는 화제들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이런 고도의 두뇌 활동을 매일 한다는 건 진짜 중노동이다.

24시간 중 괜찮은 한두 시간, 괜찮지 않은 22시간

괜찮지 않은 22시간을 괜찮은 척하려면 괜찮은 2시간 동안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

아무리 초고속 충전을 해도 다음 날 하루를 견딜 에너지를 채우긴 역부족이다.

다 채우지 못한 만큼 마이너스를 내고, 마이너스를 낸 만큼 자신을 소진시킨다.

그렇게 하루씩 자신은 점점 줄어들고 작아진다.


하는 일 없어도 지칠 수밖에

충전하지 못한 채 매일 자신을 소진시켜 버티고 있으니 지칠 수밖에 없다.

신이 나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다.

신날 일이 없으니 사는 게 즐겁지가 않다.

이런 날들로 채워질 미래라면 1/10로 압축시켜 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를 알아보고 마음을 열게 하는 말, "나도 그렇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타인의 침울함 앞에서 너만 그런 게 아닌 증거로 자기 자신을 내보이는 것은 진심어린 위로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솔직한 용기와 타인을 고치려 들지 않는 속 깊은 위로가 합쳐질 때,

‘나도 그렇다’는 말은 서로를 알아보고 마음을 열게 하는 강력한 주문이 된다.


무의욕(無意欲) - 의욕이 없는 자리는 비어있을까?

의욕이 없는 마음의 그 자리는 비어 있을까?

비어 있다면 기분이 가볍고 홀가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의욕(無意欲)은 의욕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감정들이 들어앉아 있기 때문인 건 아닐까?

간절히 바랄수록 그것을 얻지 못할 것 같은 불안, 뜻한 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분노, 나만 혼자인 듯한 외로움, 남에게 이해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들이 의욕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 수도 있다.

의욕이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설 입구를 열려면 내보내야 할 감정들이 나갈 출구를 먼저 열어얄 것이다.


무의욕이라는 생명 작용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도움도 불가능하다는 감정이기도 하다. - 데이비드 호킨스 , <놓아버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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