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쫓기는 느낌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상민의 대사
회사는 일만 잘하면 되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고, 타부서 사람들과 안면을 터야 하고, 외부 거래처와 인맥도 쌓아야 한다. 회식은 업무의 연장선이고 동호회 가입도 반(半)의무적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끝까지 사내 동호회에 가입하지 않았던 3명의 내향인이 그들만의 신규 동호회 <해방클럽>을 만든다. 이들은 모두 뭔가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3명 멤버 중 가장 나이도 많고 직급도 높은 상민은 시간에 쫓기는 느낌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상민) : 내가 숨 쉬는 것 다음으로 많이 하는 게, 시계 보는 거더라고, 툭하면 시곌 봐. 계속. ‘벌써 이렇게 됐나? 벌써?’ 그러면서 종일 봐. 하루 24시간, 출근하고 퇴근하고, 먹고 자고, 똑같은데, 시계는 왜 계속 볼까? (이유를 생각해 보니) 뭔가,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제대로 한 건 없고... 계속 시계만 보면서 계속 쫓기는 거야. 내가 평생 그랬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희한하게 바로 심장이 따, 따, 따, 가더라고. 그전엔 심장도 따따따따따따따... 이걸 알아채는 데 50년이 걸렸다는 게 참...
(향기) : 저도 좀 그런 편인데, 다들 어느 정도 그런 강박은 있지 않나요? 그리고 부장님이 그렇게 시간을 일분일초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알뜰하게 쓰셨으니까, 지금 사내 핵심 인력으로 계신 거 아닐까 싶어요.
(상민) : ... ‘조언하지 않는다. 위로하지 않는다.’ 저희 클럽의 규칙입니다.
(향기) : 아, 네. (살짝 민망)
(상민) : 시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순 없겠지만, 할 만큼 했으면 쉬고, 잘 만큼 잤으면 일어나고, 그렇게 내 템포를 갖는 게 나한테 가장 필요한 해방 아닐까... 그래서 ‘내 템포대로’라고 정했습니다.
시간은 빨리 가는데 나는 너무 느리게 가거나 아니면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시간에 쫓기는 걸까?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다른 이들의 속도에 쫓기는 게 아닐까? 우리는 시간에 쫓기는 게 아니라 타인의 속도에 쫓길 때가 더 많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상상하는 타인의 속도에 쫓긴다. 내가 걸을 때 남은 뛰고 있을 것 같은 상상이 계속 자신을 채근하고 독촉하는 것이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 안에 남들보다 많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 알차게 사는 거라면 이 또한 그 기준이 타인에게 있다. 같은 일이라도 남보다 빨리 해내고, 같은 하루를 살아도 남보다 많이 이루어야 알차게 살아내는 것이 된다. 이건 '알차게'라는 말로 위장했을 뿐, 지나친 자기 혹사다. '알차게' 사는 게 아니라 속된 말로 정말 ‘빡세게’ 사는 거다. 하루도 빠짐없이 ‘빡세게’ 살아낸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상민은 자신이 평생 쫓기듯 살았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심장 박동이 달라짐을 느꼈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것 말고는 외부의 그 어떤 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말이다. 자신에게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그 강박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 자체를 없애지는 못해도 그 문제로부터 받는 영향은 통제할 수 있음을 상민의 심장이 알려주었다.
상민은 할 만큼 했으면 쉬고, 잘 만큼 잤으면 일어날 거라며, 자신의 '해방클럽' 동호회 활동 목표를 ‘내 템포대로’ 라고 정한다. 상민의 이 말은 ‘남보다 더 일하고, 남보다 덜 자야 한다.’는 지금까지의 기준에게 전하는 이별 통보였다. 또한 타인의 기준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기준으로 살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친절해지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생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와 함께 시작된다.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은 인생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새로 듣고 좋다고 여긴 생각이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는 것이기 쉽다. 위대한 진리는 이미 영혼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