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독서 73일. 마음의 목소리를 소리내어 말해 주는 이
새벽독서 73일. 매일 글쓰기 99일, SSWB-Act 코칭 10주 차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고통스러운 일이 끝나면 즐거운 일이 있을 거라는 이 말은 진실일까? 큰 고통을 길게 겪고 나면 그 이후의 일들은 대부분 별일이 아니게 된다. 별일이 아니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다지 나쁘지 않고, 심각하게 나쁜 게 아니라면 되도록 좋게 좋게 생각하게 된다. 결국, ‘고진감래’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문자 그대로 철석같이 믿을 만한 말은 못 된다.
‘다 잘될 거야.’라고 위로하는 사람은 상대가 겪고 있는 일이 진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 그 마음에 위안받을지언정 그 말을 전적으로 믿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건 자기 눈을 가리고 괴물이 사라지길 바라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짓이다. 일은 잘될 수도 있고, 잘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잘 되면 좋은 거고, 잘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위안은 근심을 치유하는 대책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태이다. 장밋빛 예언들은, 근심에 빠진 사람에게 최악의 결과를 무방비 상태로 당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고의는 아닐지라도 그런 위안의 말에는 최악의 결과가 닥칠 경우 매우 비참한 것일 수도 있다는 암시까지 담겨 있다. 현명하게도 세네카는 우리에게 나쁜 일들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도록 요구하면서, 하지만 그런 결과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 -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중에서
내가 경험해 본 바로는, 고통의 위력은 아픔을 겪게 하는 데 있기보다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던 자신의 모습이 점점 잊히고, 크게 기쁜 일에도 작은 웃음 한 번 웃기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들떠 오르는 기쁨과 즐거움들을 내리누르며 힘자랑하던 고통도 총량을 다하면 기세가 꺾이고 기운이 빠진다.
나를 통과하고 있는 고통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나를 아프게는 해도 나쁘게는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배신감이 들지만 복수심을 품고 싶진 않고, 신뢰가 깨졌어도 의심의 눈빛을 장착하긴 싫다. 그렇다고 어리석음을 순진함으로 착각하고 싶지도 않다. 아! 고통은 처음부터 날 나쁘게 만들 힘이 없었던 거였지? 그 힘을 내가 고통에게 쥐여주지 않는 한 말이다.
이런 생각에 이를 수 있었던 건 새벽독서 덕분이다. 이미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고 있었더라도 내 안의 목소리가 초라하게 위축되어 있을 땐 거의 들리지가 않는다. 내 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때 그 목소리를 대신해서 소리 내어 말해주는 이들이 있다. 새벽독서의 글벗들과 지담 작가님.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때, 그 목소리를 대신 내어주는 이를 만나게 하는 것, 그것은 고통이 의도치 않게 저지르는 실수일까? 아니면 고통이 남모르게 감추고 있는 미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