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나를 비출 때(時) 4.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며
왕족 출신 선비를 향해 당차게 시 한 수 읊던 황진이.
시인이자 서예가이며, 그림과 음악에도 뛰어난 종합예술인이었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타이틀은 '조선시대의 기녀'라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과 신분적 한계를 넘어 현세까지 전해지는 문장의 필력을 보면
그녀의 예술적 감성과 문학적 지성이 가히 천재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 그녀의 비범함을 엿볼 수 있는 시 한 편이 있다.
즉시 트이고 깨달아*
황진이
내 마음에는 흰 새가 살고 있어
그 자태를 뽐내며 너른 하늘을 날아다녔답니다
날은 저물고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을 때
어딘가 몸 누일 곳을 찾기 어렵군요
난생처음 달을 보더니
기꺼워 날아오릅니다.
비로소 드러난 우주
날개 한껏 두드려 나아 갑니다
그 끝에 펼쳐지는 즉시 트이고 깨달음이란!
황진이에게 에피파니(epiphany; 갑작스럽고 현저한 깨달음, 자각)가 있었던 게 아닐까?
500년 전 사람이 우주에 대한 시각적 형상을 접했었을 리도 없을 텐데 말이다.
현실적인 사실 관계를 떠나서 시적 영감으로만 보더라도
시인(황진이)이 의식의 초월적인 상태를 경험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순백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광활한 하늘을 만끽했음이라.
더 멀리 더 높이 온 세상을 누비고 싶은 이에겐 시간이 짧은 법이다.
날은 캄캄해지고 몸은 피곤하여 쉴 곳을 찾다가
난생처음 본 달에 마음이 이끌리어 내려앉다 말고 다시 날아오른다.
그러곤 하늘의 참모습인 우주를 대면한다.
그 순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은 힘, 그 이상의 힘으로 날갯짓을 한다.
북소리 같았을 날개의 힘찬 퍼덕임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무한히 트인 공간을 목격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깨달음의 경지를 느꼈을 것이다.
시인은 여기서 말을 멈춘다. 그 느낌은 말로 표현되지 않았을 테니까.
황진이에게 있었을 에피파니의 순간이 어떠했을지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황진이, 허난설헌, 이옥봉, 매창 시집>, 황진이, 허난설헌, 이옥봉, 매창, 디즈비즈북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