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아시(詩照我時), 귀(貴)히 여김의 대물림

시(詩)가 나를 비출 때(時) 5.

by 단비

명절은 가족이 가족을 잊을까 봐 생긴 게 아닐까?

가족과 음식을 먹고, 얘기를 나누고, 안부를 살피고, 기억을 남기라고.

눈앞에 있는 가족은 물론이고, 눈앞에 없는 가족도 떠올리라고.

명절이어서 그런지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난다.

한 인간의 노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신 분.

매우 특별하셨거나 엄청 대단하셨던 게 아니라, 진정으로 존엄하셨다.


할머니는 구순을 넘겨 모든 거동을 남에게 의탁하셔야 했을 때에도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욕구에 시달리는 일이 없으셨다.

존재하는 그 자체로 귀히 여김을 받으셨고, 자신이 귀히 여겨짐에 의구심을 갖지 않으셨다.

가족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고왔기에, 자신의 존재가 곱게 느껴지셨을 것이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서 한참을 있고 지냈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밤마다 화장실(야외 재래식)에 가는 손주를 따라나서야 했던 시인의 할머니는 성가실 만도 했을 텐데,

그저 귀여운 손주를 보며 장난기가 발동하여 닭에게 절을 하게 시킨다.

그러고는 아마 손주 등 뒤에서 웃음을 참으며 따뜻한 온기를 전하셨을 것이다.


밤뒤*를 보며 쪼그리고 앉었으랴면,
앞집 감나무 위에 까치 둥어리가 무섭고,
제 그림자가 움직여도 무서웠다.
퍽치운 밤이었다.
할머니만 자꾸 부르고,
할머니가 자꾸 대답하시어야 하였고,
할머니가 딴 데를 보시지나 아니하시나 하고, 걱정이었다.
아이들 밤뒤 보는 데는 닭 보고 묵은세배를 하면 낫는다고,
닭 보고 절을 하라고 하시었다.
그렇게 괴로운 일도 아니었고,
부끄러워 참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둥어리 안에 닭도 절을 받고,
꼬르르 꼬르르 소리를 하였다.

- 정지용, 「별똥이 떨어진 곳」 중에서 일부 발췌

※ 밤뒤*: 밤에 똥 누는 일


누군가를 귀히 여긴다는 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매번 할머니의 깊은 단잠을 깨울 수밖에 없는 손주의 심정을 속 깊이 헤아리면서도,

개구진 장난을 얹어 웃음 지으며 어린 손주의 밤길을 살펴줄 수 있음에 좋아라 하는 것.


시인의 할머니는 손주의 기억 속에 무엇을 심으셨는지 모르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기억 속에 무엇이 심기었는지 알 수 있다.

할머니가 시인을 귀하게 여겼음을, 그리고 시인이 할머니를 귀하게 기억하고 있음을.

그렇게 귀(貴)히 여김은 귀(貴)히 여김으로 대물림 된다.



저의 글밭에 들러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귀히 여기시는 소중한 분들과 훈훈한 기억 많이 쌓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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