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책 천천히 읽기 6.
데카르트의 가장 큰 책은 ‘세상’이었다.
정규 교육을 통해 철학, 법학, 의학, 과학 등 여러 학문을 섭렵했으나,
그가 진정으로 가치를 둔 공부는 세상 속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20대의 전(全) 기간 동안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세상 어떤 곳에서는 통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른 곳에서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함을,
세상 사람들의 의견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상호 모순되는지를 생생하게 경험으로 체득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선례나 관습을 무턱대고 믿지 않았고,
모든 것에 의심‧의문을 품는 ‘회의(懷疑)’를 가졌다.
좋은 정신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것을 잘 적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위대한 영혼은 가장 큰 덕을 행할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주 천천히 걷는 사람은 언제나 – 올바른 길을 따르기만 한다면 – 그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서 달리는 사람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중략) 이처럼 세계라는 책 속에서 연구하고 경험을 쌓는 데 몇 년을 보낸 뒤 나는 어느 날 나 자신 안에서도 연구하기로, 그리고 내 정신의 모든 힘을 내가 따라야만 하는 길을 선택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의 서문 중에서
데카르트가 원한 것은 철학적 문제를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원리는 ‘직관’과 ‘연역’이다.
직관은 ‘이성에서 나오고, 맑고 주의 깊은 마음의 확실한 생각’을,
연역은 ‘직관에서 출발하여 논리적 절차로 얻어진 명제’를 말한다.
이렇게 그의 삶을 그의 생각의 중점에 놓고 보면, 그의 철학의 중심도 옮겨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그의 이성적 방법이 행동의 영역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삶과의 연결을 통하여서이다. 그리하여 <방법서설>도, 그가 이미 밝힌 바 있었던 원리와 방법에 의한 보편 과학의 재구성의 작업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삶의 문제와의 관련에서의 인식론적 출발점에 대한 확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중에서
우리는 통렬하게 직접 겪은 경험에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매우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후에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깨달음은 직관적인 형태이지만, 성찰의 계기가 되는 직접 체험이기도 하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직관’을 자신의 사유 방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는다.
그리고 김우창 교수는 체험적 진실에 충실한 데카르트의 이런 태도를 높이 사며
‘좋은 삶을 살려는 사람의 전형’이라고까지 말한다.
데카르트에게 ‘회의’는 사유하는 방식, 이론에 대한 회의이지, 삶에 대한 회의가 아니다.
그에게 ‘회의(懷疑)’는 참되고 확실한 것을 탐구하기 위한 ‘방법적 회의’였다.
따라서 데카르트를 ‘회의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시대에 만연했던 회의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데카르트가 강조하는 ‘회의’는 세상에 대한 비관적 회의가 아니라,
권위자나 전문가가 말했다고 해서 그것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이다.
생각하는 자신과 그 생각을 의심하는 자신이 공존하는 인간의 사유 체계는
의심과 확신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든다.
데카르트는 그 의심과 확신의 '방법'을 터득한, 스스로 정립한 이였다.
그는 아무런 의심이 남지 않는 확신의 명제를 얻기까지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함을 강조하며,
똑똑한 자가 제대로 사유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을 400년 전에 이미 예견했다.
가장 위대한 영혼(이것을 가진 사람)은
가장 큰 덕을 행할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다.
*깊은 마음의 생태학: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김우창, 김영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