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수집 일지 19
위로를 찾기 위해 글을 쓰면서부터 미리 예정된 만남인 양 아주 자연스럽게 위로에 대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됐다. 나처럼 위로가 필요한 때에 다른 사람들은 무엇에 위로받았는지 들여다볼 기회가 많아졌다.
사람들이 위로받는 것은 정말 무궁무진했다. 힘이 되는 말과 글, 옆에 있어 준 사람과 멀리서 염려해 준 사람,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수많은 음식, 사계절의 변화, 추억이 깃든 물건, 음악이나 그림, 빗소리와 바람소리 등등 자신을 둘러싼 그 무엇인가로부터 각자의 방식으로 위로받았다. 어떨 땐 온기로, 어떨 땐 향기로, 밝은 빛으로, 진한 어둠으로, 위로가 드러내는 모습들은 매우 다양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 그 무엇은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기도 했다. ‘괜찮아’, ‘힘내’라는 말은 분명히 위로의 말이기는 했지만, ‘괜찮아야 보는 사람도 편하지.’ ‘힘을 내야 문제를 해결하지.’라는 채근과 독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말 없는 침묵은 어떤 이에겐 속 깊은 우정이 되었고, 다른 이에겐 서먹한 거리감으로 남았다. 까만 밤하늘은 누군가에겐 광활한 우주가 주는 큰 위안이었고, 다른 누군가에겐 끝없이 이어지는 깊은 절망이었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을 수도, 그 모든 것이 위로가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을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 일축할 수는 없다. 위로라 여겨지지 않는 것을 의식적인 노력으로 위로가 맞다고 생각한들, 그것이 진짜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 긍정의 암시로 자기 최면을 걸 듯이 모든 것에서 위로받았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속인 마음은 언제나 허기질 수밖에 없다.
'행복'을 남과 비교하는 게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처럼, '위로' 또한 누구와 비교하며 견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빚 독촉이라도 하듯이 서둘러 아무 데서나 위로를 받아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남에게 위로가 된 것이 나에게 똑같이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위로는 아픔이 덜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그대로 이해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