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준 위로

위로수집 일지 6

by 단비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은 맨 마지막 기억이 그 전의 기억들을 다 덮는다는 말일 것이다. 또는 가장 생생한 마지막 기억에 맞추어 예전 기억들이 좋게 좋게 재구성된다는 말일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됐든 우리 할머니는 98세까지 행복하게 사시다가 평안하게 임종을 맞이하셨다. 할머니 삶의 끝자락이 좋았기에 그 앞의 모든 시간들이 다 좋게 기억된다. 할머니 본인의 기억은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우리 가족들의 기억 속에 할머니는 행복한 인생을 사신 분으로 남아 있다.


할머니는 노년에 혼자 걷지 못하셨지만, 항상 파스텔 톤의 예쁜 옷을 단정하게 입은 모습으로 아이 같이 근심 없는 미소를 띠고 계셨다. 노화로 인해 신체 기능과 인지 능력을 서서히 잃어 가면서도 할머니는 누가 자신을 싫어할 까봐 걱정하거나,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게 될 까봐 불안해할 일이 없으셨다. 이건 전적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사셨던 작은 삼촌 내외의 정성 덕분이었다. 우리 모두 할머니를 좋아했고, 할머니는 혼자 계실 일이 거의 없었다.


자신의 존엄함을 인식한 사람은 자기 가치를 확인하려는 욕구에 시달리지 않는다.

- 게랄트 휘터(2019),「존엄하게 산다는 것」중에서


나는 할머니가 노년에 자기 가치를 확인하려는 욕구에 시달리지 않는 게 정말 좋았다. 스스로 옷단장을 할 수 없어도, 두 발로 혼자 걸을 수 없어도, 남에게 과시할 아무런 능력이 없어도 할머니는 생에 남겨진 날들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채우셨다. 할머니의 건강을 돌보고, 마음을 살피는 이들이 주변에 늘 있었고, 그들이 할머니와 함께 있는 걸 감사히 여긴다는 걸 너무 잘 아셨다. 할머니는 한순간도 이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셨다.


어느 날 작은 외숙모가 톡방에 짧은 동영상을 올리셨다. 엄마, 삼촌, 이모들이 할머니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웃고 떠드는 영상이었다. 할머니가 구순을 훌쩍 넘기신 때니까 그 자녀분들도 모두 환갑을 넘긴 노인들이셨다. 삼촌은 할머니가 손을 내리면 그 손을 잡아 위로 올리면서 “어머니, 박수~”하며 손뼉을 치게 했다. 그러고는 노래 하나 부르시라고 계속 보채자, 할머니는 성가셔하면서도 무슨 타령조의 노래를 부르셨다. 잘 들리지도 않는 힘없는 노랫소리에 아들 딸들은 그저 좋아라 손뼉 치며 환호했다.


나는 많이 힘들 때 이 영상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미친다. 타인이 곱게 바라봐주면 자신의 눈에도 자신이 곱게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할머니도 자신을 소중하게 느끼셨다. 할머니에 대한 이 기억 덕분에 나는 사람이 존재 자체로 귀하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글로 읽은 것, 말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중에 가장 강력한 배움은 눈으로 본 것이었다. 삼촌과 이모들의 재롱잔치는 그렇게 나에게 잊지 못할 배움으로 남았다. 눈으로 직접 보며 마음에 새겼으면서도, 고난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나 자신이 존재 자체로 귀하다는 인식을 붙들고 있기가 어렵다.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무능과 실패로 여기는 것은 결국 타인이 준 상처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낸 상처가 된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그 상처를 나 자신에게 내고 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족들이 준 배움을 떠올리며 나 자신에게 스스로 상처 내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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