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준 Jul 23. 2022

하버드의 여름학기

여름학기 3주 요약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업을 시작한 지 3주가 지났다. 더 늦기 전에 기록해보는 하버드 일기.

1. 다이빙 들어갔다 온 기분이다.

오랜만에 무언가에 깊숙이 들어가는 경험을 하는 중이다. 일을 할 때는 빠르게 넘어갔던 문제들을 학교에서는 수백 페이지 리딩으로, 토론으로, 페이퍼로 곱씹고 이론도 적용하고 있다. 행동변화 프로그램의 특성상 보건, 영양, 청소년, 아동보호 등 다양한 팀과 동시에 일했었는데, 학교에 오니 보건이란 큰 바다에 뛰어들어 국제관계 렌즈로, 경제학 렌즈로, 사회학 렌즈로 보건만 깊이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모든 리딩과 토론이 보건이란 틀 안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오랜만에 몰입의 경험을 하는 중이다. 


2. 일로 배우고 책으로 복습하다.  

세상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내 프로그램 동기중 30%는 보건학을 석사로 하지 않은 친구들이다. 나도 그중에 한 명. 보건학을 수업에서 배워본 적이 없는 나지만 수업시간에 배우는 보건 경제학이, 국제보건 주체들의 역학관계, 리더십 수업들 모두 다 실무로 배운 것들을 책으로 토론으로 다시 푸는 느낌이다. 현장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누군가가 이론과 접목해서 책과 논문으로 발표를 해놓셨고, 난 그걸 읽고 토론을 나눈다. Lancet 같은 유명한 저널에 담긴 사회역학의 이야기들은 내가 네팔 지방에서 봤던 그 산모의 이야기 같기도 하고, 아동비만으로 살아가는 말레이시아의 어린이들 이야기 같기도 하다. 리딩이 살아 움직이고, 그 위에 내 경험을 녹여서 토론에 임한다. 무엇보다 다른 친구들의 경험 얹은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동기 모두가 나같이 각자의 현장에서 일로 국제보건을 배웠고 학교로 돌아와 책으로 복습하고, 수업 중 토론으로 다지기를 하는 친구들이다. 


3. 이제 영어가 문제가 아니다.  

플래쳐에서 석사를 할 때는 영어가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생각은 많은데 이걸 영어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답답했다. 그리고 무척 떨었었다. 덜덜. 10년이 흘렀고 오늘의 나는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속도에 얼추 맞추어 영어가 나온다. 개발도상국 현장에서 온갖 영어 스타일에 귀와 입이 길들여져서 이제는 수업시간에 시뮬레이션할 때 그 지역 스타일 영어도 흉내 내며 애들을 웃기기도 한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이제는 영어가 더 이상 큰 문제는 아니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수 있으니 이제는 무엇을 말하는 게 더 중요해졌고 어떻게 더 간결하고 교양 있게(?) 전하는 게 중요해졌다. 그만큼 아무 말이나 뱉지 않기 위해 많이 채우고 생각해야겠단 생각을 해본다. 아, 물론 영어로 "잘" 쓰는 문제는 말하는 것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긴 하다.


4. 토론으로 배운다. 

난 토론이 그렇게 좋다. 왜 이렇게 좋은 교육 방법으로 우리는 배우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초중고에서 토론으로 지식을 배웠다면 그렇게 많이 혼나지는 않았을 텐데. 잔다고, 집중 안 한다고, 말 많다고. 어찌 되었든 한국에서 "말이 많은" 아이였던 내가 토론식 수업에 오니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내 생각을 말하고, 리딩에서 하는 주장에 반박하고, 토론 방향을 돌리는 질문을 한다. 내가 내 생각을 펼칠 때 건너편의 친구들이 고개를 끄떡일 때 느끼는 쾌감은 말로써 사람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너무나 큰 선물이다. 그런 "축제"의 현장을 매일 겪고 있다. 지금 듣는 리더십 수업은 리딩을 하고 와서 수업시간에는 내내 토론만 한다. 책에서 본 내용을 토론에 던져놓고 각자 잘근잘근 씹어서 각자 구미에 맞게 소화해서 돌아간다. 소화를 한 후에는 그걸 글로 적는다. 그게 과제다.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면 우리 프로그램 수업은 클럽하우스를 오프라인에 옮겨놓은 것 같다. 마이크 각자 키고 얘기하는 그런 팝콘 스타일 토론 말이다. 


5. 나만 돌 I가 아니다. 

내가 속해있는 프로그램 (Doctor of Public Health, DrPH)엔 9명의 동기가 있다. 3명은 미국인이고 6명은 인터내셔널이다. 국적도 한국, 스웨덴, 시에라리온, 호주, 중국, 인도로 다양하다. 평균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 다들 잘 나가는 커리어를 내려놓고 학교로 온 리스크 테이커다. 게다가 자녀들이 2-3명씩 있는 부모들도 있고, 모두가 얇아진 지갑 앞에서 학교서 주는 공짜 점심이 남으면 싹싹 담아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우리끼리 모여서 이런 선택을 한 게 옳은 것인가 얼마나 비싼 선택인가 얘기를 하며 웃곤 한다. 큰 꿈을 가지고 왔지만 문득문득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게 맞는지, 기회비용이 너무 큰 선택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다가올 때 주위를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만 돌 I가 아니다. 이들이 있어 든든하다. 

 

6. 다들 일진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유난히 높아진 보건의 인기(?)때문에 가장 많은 지원자가 지원했다고 한다. 200명이 넘는 지원자 중에 9명이 우리 프로그램에 들어왔으니 약 4.5%의 합격률 인 셈. 뭐 하버드 박사, 그것도 미드 커리어들이 오는 프로그램이라면 예상은 했지만 다들 각자의 분야에서 리더로 잘 자라고 있던 친구들이다. 얼마 전까지 미국 CDC, WHO, 아프리카 개발은행, IFRC, UNICEF, 스탠퍼드 내 헬스 스타트업, 하버드 연구소 등에서 일했고 석사들도 존스홉킨스, 옥스퍼드, 콜롬비아, 하버드, 그리고 플래쳐(?) 같은 일진 학교에 한 친구들이다. 배경만 보면 업계 일진이다. 모두가 학교라서 가드를 내리고 편하게 만나지만 실무로 돌아가면 협상 테이블 반대편에서 만나기 꺼려할 그런 친구들일 테다. 있는 동안 열심히 배워야겠다. 이렇게 모아준 프로그램에 감사할 뿐. 


국제보건학 수업 마지막 시간. 동기들과 티칭팀이 함께.

7. 서로의 연약함으로 친해지다.

우리 프로그램의 첫 수업은 Personal mastery라는 수업이다. 리더십 코스지만 자기 수양과 자기 인식 훈련을 통해서 더 좋은 리더,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리더로 만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진 수업이다. 내 프로그램의 한 축은 리더십이어서 이 수업은 1년 넘게 이어지며 수업 이외에 하버드에서 따로 개인 코치를 붙여주면서 리더십을 기르는 데 투자한다. 이 수업은 "하버드 수업이지만 하버드스럽지 않은 수업"이라고 교수가 이야기했다. 처음부터 본인의 연약함 (vulnerability)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흡사 교회 수련회 모임 혹은 약물 치료할 때 하는 재활 훈련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자기를 돌아보고 나눈다. 그리고 중간중간 산책을 하고 (그래서 일부러 하버드 수목원에서 수업을 한다) 명상을 하고 돌아와서 나눈다. 모두가 10년 넘게 세상에서 말하는 프로의식으로 무장하고 달려온 프로들이다. 잠시나마 그 가드를 내려놓고 인간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서로의 연약함과 약점을 듣고 품어준다. 수업 시간에 눈물을 흘리는 게 이상하지 않은 수업이라면 이해가 가려나. 아무튼 이상하게 힐링되는 수업니다.  


8. 좋은 직장만을 구하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다.

동기 대부분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이 프로그램에 온 이유가 좋은 직장만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좋은 직장을 구해서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단지 좋은 직장만을 구하기 위해 박사를 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 졸업 후 다시 업계로 나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본인의 영역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리더가 되기 위해 학교로 온 친구들이다. 프로그램의 모토도 보건 분야의 체인지 메이커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래서 지금 내 삶에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 (disruptive change)를 온몸으로 느끼고 기록하고 나누려고 한다. 이 시간을 통해 나의 사명과 방향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9. 네트워킹. 네트워킹. 네트워킹

미국은 좋으나 싫으나 네트워킹이 중요한 사회이다. 네트워킹이란 인맥 관리(?)라고 번역을 할 수 있으려나. 한국에 바로 적용하긴 힘든 콘셉트이긴 하다. 미국에선 나 혼자 공부하고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분야의 다른 사람들과도 교류하고 연결되어있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네트워킹을 통해 같이 연구를 하기도 하고, 잡을 구하기도 하고, 회사를 세우기도 한다. 한국사람으로 미국식 네트워킹에 적응하는데 석사 때 많이 고생했는데 이걸 다시 해야 한다. 뻔뻔하게 내 소개를 장착하고, 여기에 저기에 이메일을 보내고, 줌 콜을 해야 하고, 커피 챗을 해야 하고, 때로는 내가 원하는 걸 부탁해야 하고. 또 많이 거절도 당해야 한다. 그러다가 좋은 기회가 온다.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 흥미로운 교수님, 센터들을 추리며 시동을 걸고 있다. 120% 외향적인 나도 네트워킹이 귀찮고 그런데 우리 I형들은 얼마나 힘들까. 이제는 나이가 들어 더 뻔뻔하게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두려움이 슬슬 올라오는 걸 보니 다시 멘탈을 가다듬어야겠다.


10. 나의 삶의 최고의 가치는 Faith입니다. 

리더십 수업에서 나의 삶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가치 2개를 뽑으라고 했다. 리딩에 따르면 2개 이상의 가치는 진짜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 그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살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산물이라고 했다. 나에겐 많은 가치 중에 딱 2개를 뽑으면 Faith (신앙)과 Growth (성장)이다. 첫째는, 성경 속의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나의 신앙. 둘째는, 안주하지 않고 성장하며 살겠다는 나의 삶의 결심. 수업을 통해 공공연하게 나의 신앙과 그로 인해 나오는 평안함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안정적으로 이 길을 걷는 이유. 그건 다 섬세하신 주님의 계획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성경에 나와있다. 세상이 보지 못하는 믿음의 힘이 오늘도 나를 이끈다. 

각자의 가치를 벽돌에 그려보는 시간을 가짐


매거진의 이전글 하버드로 떠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