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준 Dec 15. 2023

포기하지 않는 힘

하버드에서 박사생으로 살아남기


살아생전 가장 어려웠던 것을 배운듯한 이번 학기가 마지막 페이퍼를 제출함으로 끝났다.


태어나서 이렇게 어려운 것을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영어는 다 들리는데 내용은 이해가 가지 않았고, 뭔가 자꾸 설명을 하는데 큰 그림이 보이지 않았던. 읽어도 읽어도 구조가 그려지지 않아서 머리에 집어넣기가 힘들었던 나날들이었다. 웬만한 건 이해가 빨라서 알았는데 정말 이런 통계/방법론 수업에서는 한번 렉이 걸리면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내 성격이 그랬다. 뭔가 중간에 이해가 안 가면 그다음 단계로 쉽게 나가지 못했다. 속만 답답하고 소화 안되는 배에 자꾸 음식을 부어 넣는 기분으로 지냈던 시간들이었다. 느린 소화 기능을 가지고 살아간 한 학기.


학교에 왔으니 배울 거면 제대로 배워보자 생각했다. 박사생들을 위한 하드코어 연구 방법론과 논문을 많이 읽는 수업들. 굳이 안 그래도 되었는데 이번 학기에 뭔가 담판을 지어보고 싶었다. 나도 이제 박사생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용기 있게 도전장을 던진 한 학기였다.


이번 학기의 중심이었던 4가지 과목들과 그 교수님들에 관한 이야기.


1. Social and Behavioral Research Methods

PhD 2학년들이 퀄을 위해 듣는 수업. DrPH 학생은 나 혼자. 평균 나이 10살 넘게 차이 나는 똑똑한 박사생들 사이에 아저씨 하나. 실라버스를 보니 Factor analysis 랑 longitudinal data analysis를 데이터 수집부터 분석, 논문, 포스터까지 만드는 수업이라 맘에 들었다. 내가 맨날 남이 가져다주는 survey만 리뷰했지 내가 survey를 만들고 이 질문들이 제대로 된 답을 가져올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해본 적은 없으니까. 남이 분석해놓고 데이터로 논문만 쓰고 코멘트했지, 내가 데이터 클리닝부터 R로 데이터 분석을 거쳐, 페이퍼로 A-Z를 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다시 배워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요령이 아니라 기본기를 배우고 싶어서 들어갔던 수업.


이 수업을 듣기 전에 과연 내가 들을 수 있을만한 수업 일지 물어보려고 교수를 찾아갔었다. 내가 1학년 때 어떤 방법론 수업 들을 들으며 준비를 했고, 얼마나 학교를 오래 떠나있었는지도 말했다. 이야기를 쭉 듣고 나에게 "내가 가르쳐 줄게. 모르니까 배우는 거지. 걱정하지 말고 들어봐."라고 말해줬다. 하버드에 와서 처음으로 교수님 말고 선생님을 만난 느낌이었다. 내 지식을 너에게 전달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아는 걸 너한테 가르쳐 주겠다는 과외 선생님 같은 느낌. 그 교수를 믿고 마지막 데이터 분석 페이퍼 쓸 때는 매일 찾아가서 내 컴퓨터로 R 코딩도 짜주고 새벽에 내가 환장 나서 이메일을 보내면 아침에 답장이 와 있었다. 귀찮을 만도 한데 자기가 한 말이 있어서인지 싫은 내색 한 번도 안 내고 정말 R 초보인 나에게 하나씩 하나씩 노트에 써가며 가르쳐 주었다.


2. Econometrics for Health Policy

계량경제학 수업. 내가 기획하던 프로그램을 영향 평가 (impact evaluation)는 많이 해봤지만 그 뒤에 방법론에 관해서는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많이 평가를 하고 논문도 냈지만 방법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경제학자인 교수님이 설명하는 영향 평가의 방법론은 안드로메다 언어였지만 꾸역꾸역 소화해 보려고 했다. 화/목 아침 8시 수업. 한 학기 내내 빠진 수업 한번 없이 성실함 하나로만 달려들었다. 수업 시간이 너무 일러서 매번 정원의 반 정도만 오는 수업이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렇게 수업을 빠지고 나중에 녹화본을 2배로 돌려보며 공부한다고 했다. 난 도무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했고, 모르는 게 있으면 교수를 멈추고 질문을 해야 했다. 때로는 내가 이해가 안 되어 약간 짜증 나게 왜 나를 이해 못 시키냐는 느낌으로 질문한 (티는 안 났지만) 순간들도 있었다. 수업같이 듣는 친구가 그랬다. 녹화본 들을 때마다 네가 자꾸 질문하는데 질문 소리가 잘 안 들려서 뭔가 끊기는 느낌이야. 민폐(아)저씨라도 난 수업에 왔으니까 그렇게 매달렸다. 매주 있는 과제와 중간/기말을 치르고 나니 큰 그림이 보이더라. 안에 있을 때는 뭘 배우는지 몰랐는데 이 숲을 나와서 보니 같은 것들을 다르게 보는 눈이 생겼다. 내가 유엔에 다시 돌아가서 프로그램을 평가한다면 이렇게 해야겠다. 박사 논문 방법론에 관한 방향도 찾은 수업이었다.


싱가포르 출신의 이 교수님은 매주 한번은 지하철에서 같이 내렸다.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 걸어오는 15분.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친해질 수 있었다. 자녀가 3명이나 있는데 호주에서 교수를 하다가 미국으로 넘어온 이야기. 자기는 평생 연구만 해서 내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크리스천이란 것도 알게 되어서 신앙 얘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 학기 매주 한번은 같이 등교를 같이했다. 여전히 나에게 어려운 계량경제학이지만 논문 쓰다 모르면 찾아가서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이해하는 건 다른 일이지만) 선생님이 생긴 것 같아서 안심이 된다.


3. Experimental Methods in behavioral research

하버드 경영대 박사 수업. 내가 언제 경영대 박사 수업을 들어볼까 했지만 제목이 내 관심을 끌었고 2명의 교수님들이 사회심리학 박사를 한 분들이라서 심리학/조직 행동 관점에서 행동 변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었다. 경영대는 돈이 많아서 건물도 좋고 식당도 너무 좋다. 심지어 음식도 다른 어느 캠퍼스보다 고급 지고 맛난다면 믿어지려나. 수업은 매주 사회심리학/조직 행동 관련 논문을 주제별로 읽고 3시간 동안 토론하고 저자를 모셔서 이야기를 듣는 세미나 수업이었다. 사회심리학/조직 행동의 접근법이라는 게 보건대의 접근법과 너무나 달라서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건대는 실제로 현상을 보고 그 현상에 있는 구성원들에게 데이터를 수집해서 분석하는데 사회심리학/조직 행동 쪽 논문들을 대부분 랩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개인들의 반응들을 주로 온라인 서베이를 통해서 조사해서 그걸 바탕으로 사회현상을 규정하고 예측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보건학과 다르게 조금은 미시적이고 개인의 행동보다는 행동 변화의 과정에 대한 이론 연구와 측정 방법의 정교함에 관한 논의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수업에서는 실제로 행동 변화 개입을 디자인해서 수업 시간에 배운 방법론으로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Pre-registered report 쓰는 게 과제였는데 기말 과제로 20장 정도의 페이퍼를 썼다. 내가 쓴 페이퍼는 "The impact of administration of depresesion screening tool (PHQ-9) on help-seeking behaviors and mental health outcomes among young adults in the US."였다. 지난 학기 케네디 스쿨 Todd Rogers 교수님 수업 때 배운 심리학 이론과 프레이밍을 활용해서 디자인을 했다. 내 가설은 우울증 테스트인 PHQ-9 테스트를 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건강에 관한 행동 변화를 이끌 수 있고 본인의 PHQ-9 스코어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학기 초에는 논문 읽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논문 위를 휙휙 점프하면서 내가 원하는 부분만 읽어내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4. Practical Communications Strategies and Tactics for Influencing a Healthier World

이름이 상당히 거창한 수업. 보건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짜는 것이 수업의 기말 과제였는데 지난 10년 돈 받고 하던 일이 그건데라며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과정 과정마다 수업과 피드백을 받아 가며 한 학기 동안 발전시켜나갔다. 무엇보다 짜내면 짜내면 전략은 언제나 간결해지고 포인트가 생겼다. 이 수업에서의 가장 큰 성과는 Op-ed (사설)을 쓰는 과제를 평소에 관심을 가지던 북한 백신 접종률 폭락에 관해 썼고 몇 번의 수정과 피드백을 받아 이곳저곳에 투고했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뉴욕타임스랑 워싱턴 포스트에 보냈는데, 답장을 직접 받았다. 안 받아준다고 ㅎㅎㅎ 그래도 뉴욕타임스에 제출해 봤다는 만족감으로 다른 매체들에 기고를 했고 결국에는 외교 쪽에서 알려진 The Diplomat이라는 매체에 글이 실리게 되었다.


이 수업의 교수님은 실제로 디씨에서 헬스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회사의 대표였는데 홈페이지를 보니 규모가 크고 클라이언트들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그런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 교수님은 하버드 보건대 교수님들의 연구를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는 책사 같은 역할을 하고 계셨다. 우리 학교의 교수님들이 연구자로만 남는 게 아니라 TED의 연사로, CNN에 나오도록, 타임지에 실리도록 하는 분이었다. 구슬 꿰어 대중과 연결하는 전략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2학년 1학기.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아무리 들어도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나의 부족함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나를 매일 발견했다.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못할 것 같은 일도 쪼개서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면 해낼 수 있다고. 시작할 때는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일들도 결국에는 다 해낼 수 있었다. 잘해서가 아니라 멈추지 않아서이다. 어렵다고, 이해가지 않는다고,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내려놓지 않았다. 우직하게 그 자리에서 할 일을 하려고 했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았다. 완벽하게 해내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완벽한 논문보다 끝내는 논문이 더 위대하다는 말을 되새겼다.


특히 이번 학기는 일을 하면서 공부하려니 머리는 하나인데 2개의 방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일을 할 때의 스피드와 자세와 공부할 때가 다른데 듀얼 모드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큰 무리 없이 학기를 마무리 졌고, 일도 출장까지 잘 마무리 지면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난 모든 일을 빨리 배우고 쉽게 질리는 편이다. 그래서 포기가 빠른 편이기도 하다. 진득함과 거리가 먼 그런 성격임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서 지구력이 나오는 이유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값지게 살아나가야 한다는 신앙적인 책임감 때문이다. 성경에 나온 것처럼 나에게 준 달란트를 100프로 활용하지 않고 게으른 종으로 혼나는 종이 아닌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충분히 활용하는 삶. 그런 칭찬받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게 나의 작은 소망이다.


다음 학기에도 내년에도 여전히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분에 넘치는 일들과 압박들이 나를 짓누르겠지만 그때마다 오늘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능히 해낼 수 있음을 다짐한다. 내 능력이 아닌 그분의 능력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야 써보는 하버드 합격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