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
재택근무가 너무 좋았다. 2년 전 처음 이 Job을 구했을 때 보스턴에서 일하게 해줄 수 있다는 보스의 말에 어찌나 감사했던지.
박사를 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궁금했던 조직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였고, 돈도 벌 수 있는 기회였는데,
내가 원하는 조건으로 재택근무로 협상을 마쳤을 때 "아싸"를 외쳤었다. 재택이 아니라 제네바로 와야 한다고 했다면 난 그 기회를 날려버렸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2년이 지났고 재택근무의 단맛이 다 빠진 걸까. 지쳐가는 나를 발견했다.
지쳤다기보다는 재택근무가 나랑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심리학 수업에서 받은 Full MBTI 테스트에 따르면 나의 E 성향은 30점 만점에 30점. 그것도 그래프로는 30점 스케일의 밖에 조금 나가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을 만나 영감을 받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일을 만들어내고, 같이 즐거워하며, 같이 좌절하며 성장하는 캐릭터가 E 영역 만점자거늘. 재택근무에서 내가 아무리 많은 미팅을 한다고 하여도, 온라인을 통해 전해지는 사무실의 사람 냄새는 제한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향적인 사람의 특징은 사람 속에 있어야 social interaction 속에서 기운을 쪽쪽 뽑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내가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수다를 떨고, 관계를 만들어, 신뢰를 바탕으로 일을 만들어가고, 사무실의 동료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그런 패턴의 공식이 재택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온라인으로 동료와 수다를 떨고, 캐치업을 하고, 해도 한번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는 레벨의 공감대가 쌓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이버 관계들의 지속적인 확장에 한계점에 다다른 것 같다. 출장을 가서 팀원을 만나고 부서원들을 만나고 왔지만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뭐 했냐며 가볍게 날리는 토크 쨉에서 가족 이야기까지 하는 원투펀치까지 들어가는 기술을 쓰기에는 온라인이란 공간이 나에게 여전히 관계를 쌓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오전에 일들을 마구 처리하고 점심을 먹으러 갈 때면 동료들과 할 얘기가 산더미라 가는 길이 즐거웠고, 밥 먹고 돌아오는 길엔 뭔가 더 친해진 것 같아서 뿌듯하고 그랬는데 재택의 점심은 고요하다.
2. 컨텍스트를 읽을 여지가 부족하다.
한국 사람의 최대의 장점은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다. 해외에 나와 일하며 느꼈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주변의 눈치를 보고, 내가 어느 위치에 있고, 내가 너무 튀는지, 남이 어떻게 나를 판단하는지, 조금은 더 신경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가 자라온 환경 때문일 듯. 그런데 그런 눈치가 국제기구에서 일하면서 도움이 많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낄낄빠빠. 언제 나서고 언제 빠져야 하는지, A는 어떤 스타일의 사람이고, B는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지 빠르게 파악해서 그들에게 맞추어 주는 기술. 이런 신호들을 읽으려면 사무실에 앉아서 모니터 넘어 들리는 그들의 대화와 표정, 그리고 화장실 가며 슬쩍 지나가며 보이는 그들의 모니터에서 나오는 정보들 (휴가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고 있군!)까지 모두 유용하다. 그래서 우리는 컨텍스트 (분위기)에 강한 민족이다. 그게 조직 내에서 내가 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재택근무에서는 그런 정보들이 극히 제한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쓸데없는 정보 유입이 사라지고 일만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안타깝게도 코딩을 하고,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없는 일을 만들고, 그걸 잘 프레임 해서, 남들과 조율하고, 소통하는 일에 가깝기에 컨텍스트를 읽는 게 큰 도움이 된다.
큰 그림을 볼 힌트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과 행동들은 가끔 똥볼을 차는 축구 선수의 마음이랄까. 나만 그러고 있었구나. 사무실에 있는 그들은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데. 의도치 않은 배신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정보들. 그들이 날 배제하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물리적 거리감 때문에 놓치게 된 정보들. 그런 것들이 기회가 될 수 있는데 다 못 잡는 것이 아쉽다. 눈치 백단이 한쪽을 가리고 전장에 나간 셈이다.
3. 결국 일을 더 하게 된다.
얼핏 재택근무를 하면 일을 덜 하는 거 아니냐 생각할지 모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자율을 주고 성과를 강조하는 근무환경에서는 근무시간은 큰 의미가 없다. 최대한 성과를 위해 효율적으로 일해보지만,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여지없이 많은 것들이 투입된다. 시간도 그렇고, 스트레스도 그렇다. 유연함이라는 선물 뒤에 숨겨진 성과의 압박은 결국 깨어있는 시간을 전부를 담보를 삼는다. 누군가 나를 찾을 때 그곳에 항상 있어야 한다는 압박, 언제든 콜이 올 때 멀끔한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 거기에 제네바의 시차로 인해, 아침에 쌓여있는 메시지와 메일들이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물론 제네바의 업무가 끝나면 내 회신과 팔로우업들이 가지만, 대부분의 보스들이 밤에도, 출장 중에도 바로바로 답이 올 때는 나도 마냥 쉬고 있을 수가 없다.
사무실에서 일하면 (쓸데없는) 미팅에도 불려가고, 워크숍도 있고, 다른 직원들과 커피도 마시고, 점심도 천천히 먹고 오고, 공휴일도 있지만, 나에겐 그 모든 것들이 제한적이다. 심지어 미국의 공휴일에는 스위스가 일하니 일하고, 스위스 공휴일에도 내가 담당하는 마켓은 일하니 일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의자에 앉아있는 절대적인 시간은 재택이 적을지 몰라도, 시차와 재택의 마음의 빚 때문에 머리는 업무시간 이외에도 계속 굴러가는 느낌이다.
이런 생활을 2년간 하니 이제는 재택을 조금 벗어나야 나라는 사람의 웰빙과 퍼포먼스가 더 좋아질 것 같다는 종합적인 판단을 내렸다. 처음에는 감사함의 대상이었던 재택근무. 이제는 졸업을 하고, 불러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어디론가 가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사람 속에서 부딪히며, 컨텍스트를 읽고, 나라는 사람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그곳. 물론 그렇게 사무실로 돌아가면 그 나름의 단점들이 많겠지만, 사무실에서 "낭비되는 시간"들도 돌이켜보니 업무를 위한 양분 같다는 (꼰대 같은) 생각을 해보는 밤이다. 아마도 웰빙의 극대화는 재택과 사무실 그 중간 어디즈음에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개인 성향의 차이다. 애초에 나는 외향적이고, 조직의 운영과, 그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소통하며, 일을 만들어가는지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기구가 재미있고, 그 속의 조직을 리드 해보고 싶은 비전이 있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재택을 온몸으로 경험해 본 지난 2년의 시간이 앞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몸으로 직접 배운 경험은 어디 가지 않고,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