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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ful Leadership

공감과 연민의 리더십에 대하여.

by 김형준


12년 전, 석사를 마치고 처음으로 유니세프 네팔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직함은 보건행동변화 프로그램 담당관. 돌이켜보면 첫번째 유니세프 사무소에서 내 인생의 롤모델들을 참 많이 만났던 것 같다.



그때만해도 덜컥 타이틀이 주어지고 일을 시작했지만, 내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진짜 보건행동변화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하는 결정들이 맞는 결정들인가. 그러던 중에 발견한 "오하이오 코스." 내 분야의 트레이닝으로 당시에 온라인으로 몇개월 학습을 진행한 후 남아공에서 2주간 만나서 배우는 업무 관련 트레이닝이었다. 유니세프 내에서는, 특히 내 분야에서는 몇 안되는 트레이닝 과목이어서 인기가 많았고, 무엇보다 남아공을 2주간 보내주는 교육이라 아무나 보내지 않는 비싼 코스기도 했다. 그림의 떡 같던 이 코스가 나에겐 너무 간절했었다.


당시만 해도 난 코이카 다자협력전문가 프로그램을 통해 유니세프에서 일해서 유니세프를 위해 일은 하지만, 뭔가 유니세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네트워크도 부족했고, 내 스스로의 소속감도 부족했었다. 의심반으로 지원한다고 하니 내 보스였던 헨드리쿠스는 팀 예산으로 서포트 해줄테니 한 번 지원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인사과랑 주변에서는 내 계약이 1년도 안 남았고, 나보다는 더 시니어, 정규직 직원들을 위한 것이라고 안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봐야하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왜 이 트레이닝을 받아야하는지 잔뜩 준비해서 부대표 사무실에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부대표의 시간을 20분정도 얻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내가 이런 코스를 듣고 싶고, 비용이 이 정도 드는데, 사무실이 보내줄 수 있냐라고 말하며, 내가 다녀와서 이렇게 사무실에 성과로 돌려주겠다고 말하는 찰나. 부대표는 웃으며 당연하지 하며 지원서에 싸인을 해줬다.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잘 다녀오라고 격려를 해줬다.



그날의 "'Yes"가 모든 것을 바꾼 것 같다.


내 커리어의 변환은 그 트레이닝의 전후로 나뉠만큼 임팩트가 컸다. 그 트레이닝을 안 보내줄 이유가 100가지였는데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승인해준 당시 부대표는 지금 유니세프 캄보디아 소장인 윌팍이란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읽고 있는 Graceful leadership이라는 책의 저자기도 하다. 윌은 내 분야인 헬스커뮤니케이션으로 박사까지 하고 WHO를 거쳐서 유니세프에서 현장사무소 대표를 3번이나 한 베테랑 리더다.



이 책을 읽다보니 12년전 그날, 그가 보였던 호의가 이해가 되었다. 팀원들에게 기회를 주고, 코칭을 하며, 성장을 돕는. 조금 느려도 기다려주고, 연민과 공감의 자세로 팀을 만드는 것. 아마 그는 그때 지금 이 책에서 말하는 Graceful leadership을 실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몇개월의 온라인 수업과 2주간의 남아공 교육을 통해 나는 행동변화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6개월 후 네팔에서 역사상 가장 큰 지진이 났고, 내가 배웠던 스킬들을 사람을 살리는 일에 바로 쓸 수 있었던 감사한 기회를 얻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진 배움이었고, 값진 활용이었다. 이 모든 시작의 리더가 준 기회, 규정과 관례를 뛰어넘는 호의가 있었다.


네팔은 여러모로 나에게 좋은 리더란 무엇인가 가르쳐준 사람이 많았다.


대표였던 (지금은 네팔 유엔대표로 돌아온) 한나는 리더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왜 해야하는지 스피치로 설득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줬고,


다른 대표였던 토모는 많은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모습, 심지어 형광펜을 좋아하던 모습도 그에게 배웠다.


윌은 항상 직원들이 시간을 요청하는 그런 멘토였고 리더였다. 특히 로컬 스탭들이 존경하고 따르던 그런 리더의 모습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나피사(지금은 유니세프 감비아 대표)에게는 젊은 직원의 성장을 챙기고, 항상 시도해볼 수 있는 일들을 던져주던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보스 헨드리쿠스에게는 말보다는 행동. 팀원들에게 공을 돌리고, 자신은 뒤로 빠지는, 그렇게 챙겨주던 리더의 모습을 배웠다.


그렇게 나에게 일거리를 던져주고, 기다려주고, 조언해주고,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던 리더들. 그 속에서 참 많이 성장했다. 그렇게 몸으로 배웠던 리더십의 모습들은 가나를 거쳐 말레이시아까지 팀을 늘려가며 나를 가이드한 표지판이었다. 이 사람처럼. 저 사람처럼. 이 사람이었다면, 저 사람이었다면. 스스로 묻고 실행해 보고 배우며 성장한 것 같다.


요즘 같은 시기에 우리는 더욱 graceful leadership이 필요하지 않을까. 조금 느리더라고 기다려주고. 성장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그런 리더. 무엇보다 연민과 공감의 리더. 그런 모델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케이스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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