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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통과하는 "힘"

정리해고의 계절을 통과하며

by 김형준

[들어가며]

최근 몇 달 내 소셜미디어 피드에는 지인이기도 한 박소령 작가님 (이라 쓰고 누나라 부른다)의 실패를 통과하는 일이란 책에 대한 리뷰글이 많았다.


책의 제목이 오래 기억에 남았고, 요즘 내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실패를 통과하는 "힘"으로 바꾸어 글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이 글은 소령 누나의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아직) 읽지도 않고 쓰는 감상문이 될지도 모르겠다. (누나 한국 가서 꼭 사볼게 미안)



[정리해고의 계절]

내가 일하는 국제기구에 감원의 계절이 왔다. 전 세계에 퍼져있어서 티가 안 날 뿐 미국 발 국제원조 예산의 감축의 여파의 선봉에는 국제기구가 있다. 적어도 내가 일한 지난 15년간 이 정도의 대량 정리해고를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유엔기구들은 예산이 이미 20% 이상 감축되었고, 당연히 인력의 축소를 검토했고, 20% 이상의 인력 감축 계획들을 내어놓았다. 내가 일하는 기구도 30% 이상의 인력 감축 계획을 발표하고 단계적으로 정리해고의 과정에 있다. 도너의 펀딩을 받아서 운영되던 국제기구니 펀딩이 줄면 그거에 맞게 살림을 재정비해야 하는 것은 사실 어쩔 수 없다. 펀딩이 줄면 수혜자에게 가는 프로그램도 줄어드는데, 그걸 운영한다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만을 지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누군가의 선의와 다자주의라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섹터가 한순간에 붕괴되는 대공황의 시절을 겪어내고 있다.


나도 이 시기를 피해 갈 수 없는 것 같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나온 잡 마켓은 꽁꽁 얼어있고, 국제기구로 돌아가려고 둘러봐도 괜찮은 자리가 없다. 그나마 있는 자리들도 감원으로 마켓에 나온 수많은 인력으로 인해 경쟁이 훨씬 높아진 기분이다. 지원해도 답이 없는걸 보면. 감사하게도 박사과정에 시작했던 지금의 잡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지만, 이것도 내년 4월이면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다.


구조조정 논의가 발표되기 이전에는 졸업을 하면 정규직 계약을 받아서 제네바로 가는 이야기를 했던 시기가 있었다. 김칫국에 배가 차있던 그즈음 재정 축소로 인한 인원 동결 발표가 났다. 내가 생각했던 계약 전환은 물거품이 되었고, 기존에 있던 직원들은 3분류로 나뉘게 되었다. 1) 살아남은 자, 2) 올해 12월에 계약이 종료되는 자. 3) 내년 4월까지 살아남은 자. 첫 번째 그룹은 비록 복지 혜택은 줄어들지만 계약을 지속할 수 있는 생존자 그룹이고, 두 번째 그룹은 더 이상 역할이 필요가 없어진 그룹이다. 이 그룹이 제일 비참한 상황이다. 세 번째 그룹은 필요한 역할이지만 다시 지원해서 내부 경쟁을 해서 들어와야 하는 그룹. 내가 속한 그룹이다. 안타깝게도 계약직들은 모두 2번과 3번에 속했다.


구조조정의 과정은 만만치 않다. 애초에 20% 정도 감원을 한다고 했을 때, 감원은 30% 정도 하면서 10% 정도 새로운 조직도에 맞는 자리들을 연다. 그리고 감원 대상 30% 사람들에게 내부 공고 형식으로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쉽게 얘기하면 10명이 있는 팀에서 5명 정도 해고 통보를 하지만, 2자리를 새로 열어서 그 5명이 2자리를 놔두고 경쟁하는 구조. 그렇게 해도 2명이 다 채워지지 않으면 다른 팀에서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시스템. 오징어 게임과도 같은 내부 경쟁이 시작되었다.


구조조정의 민낯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타운홀 미팅 (전체 미팅)을 하고 대표가 자세히 설명을 하고 대표로서 너무 어려운 결정이라며 목을 메기도 하고, 억울한 스태프는 손을 들고, 내가 잘리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며 떨리는 말로 앞으로 조직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거라며 뼈 있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당장 다음 달에 비자 문제로 제네바를 떠나야 하는 동료들의 심정과, 애들을 학교에서 빼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부모의 모습들. 나에게 없을 내년 계획을 세우며 헛웃음을 짓는 동료들. 누가 잘린 건지, 누가 어디에 지원할지 서로 알고 싶지만 쉽게 물어보지 못하는 애매한 분위기. 애초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이런 칼바람을 기대하지 못했던 조직의 모습이다.


박사를 마친 나는 부푼 기대를 안고 본격적으로 업계로 돌아갈 참이었는데, 나도 구조조정의 여파에 자유롭지 못했다. 이곳을 떠나면 다른 곳에 갈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국제 개발/보건 잡 마켓이 얼어붙은 지금, 이곳에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감사함으로 다니던 직장이 서바이벌의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감사함보다 생존본능이 더 올라오는 지난 몇 달이었음을 고백한다.


20%가 감원 대상이라고 했을 때만 해도 새로 열릴 포지션 중에 내가 관심 있는 자리가 3-4개 있었다. 지금 일하는 업무에서 더 확장된 아태지역 파트너십 자리, 내 논문 주제기도 한 헬스 시스템, 헬스 파이낸스 자리 등 눈여겨보던 자리들이 있었다. 그래도 3-4개 중에 하나는 되지 않을까. 그러면 나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앞으로 5년은 안정적인 계약으로 (우리 업계에 5년이면 최고의 계약이기에) 제네바에서 일해볼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은 더 안 좋아져서 35% 정도의 감원으로 변경이 되었고, 새로 나왔어야 할 자리들도 재평가를 통해 줄이겠다고 발표를 했다. 지원 가능한 3-4자리가 1-2자리로 줄어드는 형국이었다. 감사하게 먼저 나온 자리에 내부지원을 했고, 20명 넘는 내부 직원들 중 6명 정도 안에 들어서 필기시험을 보고 최종 면접도 보았다. 헬스 파이낸스 자리였는데, 내 논문 주제이기도 했고, 이미 그 팀에 가서 내 논문도 발표해서 얼굴도장도 찍어놓은 상황이었다. 자신감이 있었다. 해볼 만한 게임이라 생각했다.


필기는 2시간을 주고 업무 관련 전략 PPT를 만드는 것이었다. 뚝딱 뚝딱. 할만했다. 그리고 면접에 가서 그걸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하는 것이 면접의 첫 번째 부분이었다. 나름 내가 아는 것들을 다 얘기하고 스스로 이 정도면 A- 정도는 되겠다 하며 두 번째 면접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 면접은 competency 인터뷰였다. 흔히 과거의 경험을 빗대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이야기하는 형식이었다. 유엔에 있으며 이런 인터뷰를 많이 봐서 내 스스로는 준비된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질문의 끝에 꼭 "in health financing"이라는 단서들이 붙었다. 엄밀히 말하면 competency를 물어보지만 기존 부서에 있는 사람들, 즉 그 관련 경험을 한 사람들을 위한 질문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내 경험을 이야기했지만, 뭔가 그들이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는 걸 하면서도 느꼈다. 그렇게 느끼니 더 주저리주저리 했다. B 정도의 인터뷰였다. 총점은 아마도 B+가 아니었을까 싶다.


며칠이 지나고 바로 인사과에서 연락이 왔다. 경쟁이 치열했고 나는 최종 2인에 들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어디서 부족했는지 상세한 피드백을 주었다. 특히 테크니컬 디테일이 부족했다고 했다. 약간은 예상했지만, 내 속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올라왔다. 왜 더 잘하지 못했을까. 나는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인가. 내가 박사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실무에 대한 감을 잃은 것은 아닐까. 심지어 정리해고되는 팀원들 뽑으려고 문제를 그렇게 꼬아서 낸 게 아닐까. 그런 감정들을 마주하며 며칠을 기도와 묵상에 시간을 쏟았다.


그 시간을 겪으면서 든 생각은. 붙고 떨어짐은 나의 통제 밖이다. 그러나 실패/탈락이라는 사건에 대한 나의 감정 반응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걸 실패로 보고 주저앉을 것인지, 다음 면접을 위한 좋은 준비 운동이라 생각할지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다. 거절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지만, 이걸 프로세스 해서 세상에 나올 때는 조금 더 나은 나로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프로세싱은 온전히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껏 한 번 떨어진 거다. 그것도 최종에서. 아마 100도 전에 99에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실패의 시간을 통과하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나에게 보여주신 삶의 이끄심을 묵상했다. 감사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이 커리어에서 한 번도 쉽게 주어진 일자리가 없었다. 수십 번의 지원과, 수많은 필기시험과 면접들을 거쳐서 지난 10년도 넘게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한 번도 5년 이상 계약을 가져본 적이 없이, 삶의 장기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경험들, 사람들, 감정들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게 내 삶이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그게 내가 믿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


탈락의 경험이 실패는 아니었다. 그건 아마 실패의 감정이었을 테다. 이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세상에 나올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그 과정에 나에게 기도와 말씀이 큰 힘이 된다. 이 어려운 시기를 기록하며, 어디를 가든 계속 있을 삶의 크고 작은 실패들을 그 힘으로 통과하고자 마음먹는다. 나의 몸부림이 누군가에게 응원이 되기를 바라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2)


나가며.


처음에는 엄살 같아서 이걸 기록할까도 고민을 했었다. 뭐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고, 우리 섹터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원조 축소로 가장 큰 피해는 저 먼 어딘가에 원조로 전해지는 식량과, 의약품과, 의료 서비스로 빈곤과 병듦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되지 않으면 잊어지기에 조심스럽게 감사한 엄살을 조금 부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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