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계획대로 다 이루어지면 참 좋겠네
나는 어릴 때부터 철저히 계획형 인간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소꿉놀이를 좋아했던 나는 스물여덟 살에 결혼을 하겠다고 계획했다. 그런데 내 나이 스물여덟. 결혼은커녕, 나는 그 해에 겨우 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계획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또 열심히 놀았지만, 뚜렷한 내 삶의 방향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딘가에 덜컥 취업이 된 것도 아니었다. 나이는 계속 먹어가고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 나이쯤이면 번듯한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길을 잃은 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일단 대졸자라도 되자는 심정으로 몇 년 동안 유예하던 졸업을 신청해버렸다. 뭔가 허탈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친구와 밥을 먹으러 가는 길, 학교 정문에서 나는 친구에게 푸념처럼 말했다.
“나 이제 인생계획 안 세우려고. 계획을 세워봤자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11년 전, 나는 친구와 순천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여행을 할 때에도, 늘 꼼꼼히 사전조사를 하고 계획을 가지고 떠나는 편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었던 둘째 날, 모든 계획은 어그러졌다. 순천역에서 아침 7시 첫 기차를 타기로 계획해놓고 늦잠을 잔 것이다. 우린 기차 출발시간 10분전에 겨우 일어났다. 정신없이 준비를 하고 기차역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기차는 눈앞을 떠나고 있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신기하게도 웃음부터 나왔다. 머리도 못 감고 허둥지둥 나온 우리의 차림새가 웃겨서 웃었고, 떠나가는 기차 뒤꽁무니가 얄밉게 느껴져서 또 웃었다. 계획은 열심히 세워놓고 둘 다 사이좋게 늦잠을 잤다는 사실에 친구와 내가 정말 단짝 같아서 신나게 웃었다.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고, 결국 우린 계획을 바꿔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 갔지만,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은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시간은 붕 떴지, 아침부터 난리법석 부지런을 떨었지, 거기에 한참 웃어서 배가 무지 고팠다. 터미널 근처 사람이 많던 국밥집에 들어갔다. 원래 그 식당에 갈 계획도 없었는데, 우연히 들어간 그곳에서 우리는 너무도 맛있는 식사를 했다. 기차를 놓치고 버스를 타는 바람에 보성엔 원래 계획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지만, 나는 이날 신나게 웃었고 또 아주 맛있는 밥을 먹었다.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나와 친구는 만나기만 하면 이날의 소동과 국밥을 이야기하며 웃곤 한다.
이날 이후로 순천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가 되었다. 그래서 얼마 전 한 번 더 순천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이젠 자차가 생겨 내가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간대에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계획대로 맛집에 가서 식사를 했고, 원하는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은 계획대로 잘 흘러갔고, 그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온 후 아직도 순천여행을 떠올리면 얼마 전의 여행이 아니라 11년 전 여름이 더 강렬하고 재미있게 기억난다.
중요한건 여행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11년 전의 나는 단짝친구와 함께 한 첫 여행에 들뜬 마음이었다. 조급함 같은 건 별로 없었고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계획이 틀어지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나보다. ‘될 대로 되라지.’ 라는 마음으로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것들로 시간을 보냈다. 여행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건 아니지만 예상치 못하게 맛있는 것도 먹었고 또 좋아하는 장소도 생겼다. 생각해보니 나는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의외에 순간에서 즐거움을 찾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살면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수두룩한 건 너무나 당연하다. 이럴 때 나에게 중요한 건 이미 엎어진 계획이나 새로 세우는 계획 따위가 아니라, 그저 즐기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순간을 만끽하며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을까. 오히려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할지도!
이제 나는 인생 계획이 뭐냐는 물음에, 푸념이 아니라 즐겁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계획? 딱히 없어.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안 되더라고. 내 계획은 그냥 하루하루 즐기면서 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