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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우리, 우주 #1

같은 꿈을 꾸면 엄지손톱을 눌러

by 해란
같은 꿈을 꾸면 엄지손톱을 눌러. 꾹, 눌러.


훅, 눈을 떴다. 머리카락 사이로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얼굴을 휘감은 머리카락이 날숨을 따라 힘없이 풀썩인다. 술 냄새. 어제 얼마나 마셨더라. 몸이 뻐근하다. 엄지손톱. 그저 꿈을 꾸었을 뿐인데 야무지게 말아 쥔 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누운 채 주먹을 풀고, 양손을 들어 올려서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엄지손톱. 꿈. 더워. 그만해. 지구…… 맥락 없이 떠오르는 조각난 기억들 탓에 골이 울린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눈으로 구리를 찾는다. 구리는 오늘도 어제처럼 방바닥에 푹 퍼져 있다.


어제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다른 때 같았으면 더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밥그릇 대신 주인 얼굴을 맹렬히 핥아댔을 녀석이 조용했기 때문이다. 푹 자고 일어나 별일이네, 생각하며 너부죽이 까부라진 구리를 쓰다듬다가 화들짝 놀랐다. 구리가 깔고 엎드린 러그에 무언지 모를 벌그스름한 자국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뭐지. 혈뇨라도 누었나.


구리를 달랑 안아 들고 요리조리 살폈다. 상처 난 곳은 없었지만 생식기가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다. 서둘러 지갑을 챙기고 구리를 이동장 안에 넣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동물병원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구리를 처음 주워왔을 때도 그곳에서 진찰을 받았다. 다급한 마음에 동물병원 앞 도로를 무단으로 횡단해서 냅다 병원 문손잡이를 잡았는데, 내가 문을 밀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우주였다.


어라, 안녕.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러는 넌 여기 왜 왔는데.


구리가 아픈 것 같아.


걔를 아직 기르고 있었구나.


그럼 너 없다고 얘를 내다 버리니?


구리가 낑 소리를 냈다. 우리는 동물병원으로 들어갔다.


꽃 도장을 찍었나 보네요.


꽃 도장이라뇨?


생리를 했다고요.


어리둥절한 우리를 앞에 두고 수의사는 사무적인 어조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개도 암컷은 생리를 합니다. 구리는 이제 강아지가 아니라 온전한 암컷 개에요. 교배도 할 수 있다는 뜻이죠.


안도와 함께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귀가 있으니 말이야 알아들었으나 그 말이 가리키는 바가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암컷 구리가 생리를 합니다. 내 눈에는 여전히 조그만 강아지일 뿐인데 어느새 교배가 가능할 만큼 자랐답니다. 네, 그렇군요. 그래서 이제 어쩌란 말인가요. 다 컸으니 짝이라도 찾아주라는 소리일까.

하지만 뭘, 어떻게?

마음이 표정에 드러난 모양인지 의사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교배는 보통 이르면 처음 꽃 도장을 찍은 그 이듬해에 많이 해요. 교배를 원치 않는 분들은 질병 예방 차원에서 아예 중성화수술을 시키기도 하고요. 으음, 근데 이 중성화수술이란 게……


빠바바 밤, 빠바바 밤.


엄청난 소리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베토벤 따위를 알림 소리로 지정해 둔 거냐, 과거의 나.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휴대전화 화면에 뜬 메모를 읽는다. 세 시간 뒤 천지사 면접. 천지사가 있는 동네에 가려면 우선 전철을 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버스에서 내려 헤매지만 않는다면 아마 한 시간쯤 걸려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구리 물그릇에 물을 따르고,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준다. 구리가 밥그릇을 흘끔 보더니 물만 조금 핥고 도로 픽 엎드린다. 남들보다 열 배는 강한 중력을 견디기라도 하는 것처럼. 힘겨워 보이는 구리를 애써 뒤로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수도꼭지를 튼다. 벽면 거울에 비치는 검은 눈동자 위로 구리의 까맣고 동그란 코가 포개진다. 교배. 적당한 수온의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샤워기를 세숫대야에 넣는다. 교배라니. 쪼그려 앉아 샴푸를 짠다. 새끼라니. 양손을 마주대고 비빈다. 구리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머리카락에서 거품이 인다. 어쩌나. 머리를 숙이고 북북…… 문지른다. 중성화… 중성화수술이라…… 자궁을…… 북북…… 들어낸다고 했지… 그럼 나이 들어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이 예방된다고…… 북북북…… 나중에 아플까봐 자궁을… 북북…… 배를 열어서… 멀쩡한 걸…… 북북북…… 아무리 내가 주인이라지만… 그건…… 북북…… 구리 몸인데…… 난… 아아, 내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 어쩌자고 개를 들여서…… 북북북…… 우주… 우주…… 그래, 우주.


우주가 개를 주워오지만 않았어도 애초에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세숫대야에서 물이 흘러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