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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환상의 열매

너를 어떻게 맛봐야 할까.

by 해란

우유를 사러 들어간 대형 마트에서 녀석과 조우했다. 수박과 멜론과 파인애플이 자리 잡은 가판대 한 구석, 몇 걸음만 더 다가가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녀석이 뚱딴지처럼 올라앉아 있었다. 고대 유인원의 머리털 빛깔이 이럴까. 하나같이 거칠어 보이는 다갈색 껍질에 땜통을 닮은 둥그런 자국이 세 개씩 박혀 있었다. 저희들끼리 삼각을 이루는 세 개의 땜통은 흡사 외계에서 내려온 존재의 얼굴 같아서, 어쩐지 유에프오가 쏜 빛에 감싸인 기분으로 녀석을 집어 들었다. 예상보다는 보드랍지만 역시나 깔끄러운 감촉이 흡반처럼 손에 달라붙었다.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땜통 세 개, 미지의 얼굴.

너를 어떻게 맛봐야 할까.


집으로 가져온 녀석을 식탁 위에 올려둔 채 부엌을 벗어나 정보의 바다를 헤맸다. 해답은 첫 만남부터 나를 빤히 바라보던 미지의 얼굴에 있었다. 그 동전만 한 땜통 부분이 그나마 덜 단단하니 젓가락이나 과도를 이용해 땜통을 따낸 다음 구멍을 내야 했다.


부엌으로 돌아와 하나뿐인 식칼을 손에 쥐었다. 좁은 부엌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여전히 식탁에 멀뚱멀뚱 앉아 있는 녀석을 신문지 위로 옮겼다. 다른 곳으로 굴러가지 않도록 한쪽을 단단히 붙들고 칼을 치켜들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아,


다치면 안 되는데.

그런데 다치다니, 도대체 누가?


식칼을 내리칠 때마다 느닷없이 침략을 받은 원시 부족 모양으로 껍질이 사방팔방 튀었다. 녀석은 쉬이 굴복하지 않았다. 어떻게 내리치든 태연히 상처를 감내할 뿐 도통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칼자루를 쥔 손이 저릿저릿 아팠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겼다.


알아야겠어.

네 안에 감춰진 비밀의 맛을 이제는 알아야겠어.


오지를 탐험하는 프로그램이나 화려한 휴양지 풍경 혹은 이국의 만화 속에서 종종 녀석을 보았다. 힘겹게 나무를 기어올라 겨우 얻어낸 녀석을 바닥에 내던져 맛을 보는 사람들, 녀석의 머리통에 빨대를 꽂아 쟁반에 담아 들고 나타나는 아리따운 아가씨, 붉고 탐스러운 꽃송이를 목에 걸고 녀석을 맛본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감탄했다. 놀라운 표정으로 웃었다.


너는 정글의 오아시스, 열대과일의 꽃, 그야말로 환상의 열매.

아마도 네 안에는 꿀보다 달콤한, 금단의 맛이 숨어 있을 테지.


한참 사투를 벌인 끝에야 녀석은 무릎을 꿇었다. 퍽, 소리와 함께 한쪽 귀퉁이가 깨지며 사정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단단한 껍질 안쪽으로 눈부시게 흰 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하게도 익숙한 로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바닥에 흘러 넘친 미지근한 액체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비밀이 묻어 다소 미끈거리는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아예 통째로 들고 입에 들이부었다.


제기랄.

환상은 환상 속에 머물 때 비로소 아름답다.





예정대로라면 새 소설로 찾아왔어야 하는데, 글 다듬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서 원래 발행하려던 글 대신 다른 짧은 글을 하나 올립니다. 어쩐지 양치기 소녀가 된 기분이라 부끄럽네요. 다음 주에는 꼭 새로운 소설로 <행간 새김> 발행하겠습니다.


언제나,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