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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일상주의보 #8 (완)

이따 혼내지 마요 보고 싶어요

by 해란

밤새 눈이 많이 내렸다. 하나는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를 듣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나 잤을까, 알람 소리에 부스스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세상이 온통 희푸르렀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 집을 나선 하나가 눈 쌓인 길을 뒤뚱뒤뚱 걷는다. 아직 제설 작업이 채 진행되지 않은 길을 걷자니 발이 푹푹 빠졌다. 눈길 위, 발이 닿는 자리마다 첫발자국이 찍혔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황홀감이 하나를 휘감았다. 발을 잘못 디뎌 블랙아이스를 밟으면 대번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놀라움은 잠시였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며 감각이 어찌나 짜릿한지 독서실에 도착했을 때는 약간 아쉽기도 했다.


오늘은 새로운 단서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나는 심드렁히 청소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와 환풍기와 백색소음기와 산소발생기를 차례로 켰다. 자리에 앉아 시간을 확인하니 매일 첫 번째로 오는 학생이 나타날 때가 조금 지나 있었다.


“별일이네.”


늘 정시에 딱 맞춰 도착하는 학생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쩐지 허전했다. 신정에도 독서실 문을 여느냐고 엊그제 확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눈 때문인가.”


그 학생 말고도 같은 문의를 한 학생이 여럿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시간이 꽤 흘러도 독서실 문을 여는 학생이 없어 하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개시 학생 말고도 항상 비슷한 시간대에 등장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매일 빠지지 않고 독서실에 나오는 학생들은 지난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도 보통날과 다름없는 출석률을 보였건만.


하나는 읽던 책을 덮고 아직 오지 않은 학생들의 오늘 아침 풍경을 머릿속에 그린다. 하나의 그림 속에서 그들은 평소처럼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거나 거르고, 미리 꾸려둔 가방을 들거나 가방을 꾸려 집을 나섰다가 눈과 조우했다. 눈 탓에 평소보다 느리게 걷고 배차 간격이 조금씩 늦어진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늦어지는 일정 속에서 문득문득 그래도 오늘은 신정인데, 아니지 오늘부터 새해인데 이런 날일수록…… 하며 망설이고…… 망설이느라 무심코 멈춰 서고……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고 또 시간이 지체되고…… 그러니 곧 누군가…… 평소처럼…….


하나는 카운터 앞에 덩그러니 앉아 화면이 30 분할된 시시티브이 모니터를 지켜본다. 화질이 떨어지고 채도가 낮아 어떤 선명한 색상도 우중충하게 출력해 내는 화면 속에서 그나마 제빛을 유지하는 대상은 딱 하나였다. 모니터 왼쪽 가장자리, 현관 옆 벽 자전거 주차장에 쌓여 흰빛으로 환한 그것. 눈. 눈 쌓인 풍경을 비추는 그 칸을 제외하면 다른 화면은 어느 칸이나 얼룩덜룩한 잿빛 직사각형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는 화면 중앙쯤 위치한 직사각형에 홀로 들어앉아 정수리와 등허리를 내보이고 있는 여자를 보며 귀를 기울인다. 고요하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역시 고요하다. 네 개의 문과 방음벽을 겹겹이 두른 독서실 안에서 하나는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무이 씨도 이제쯤 집에 들어갔을 텐데…….”


하나가 청소하느라 한쪽에 놓아두었던 스마트폰을 뒤늦게 확인한다. 다소 시간 간격을 둔 문자 메시지가 세 통이나 도착해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까지 메신저가 아닌 문자로 자신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는 줄 알면서도 하나는 굳이 두 번 세 번 발신자를 확인한다. only one, only one, only one.


끝나고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버스 안이에요
미리 말하면 오지 말라고 할까 봐 버스 타고 문자 보낸 거예요
이따 혼내지 마요 보고 싶어요


무이 씨의 직장과 집, 하나가 일하는 독서실을 지도 위에서 연결하면 유독 한 변이 긴 삼각형 꼴을 이룬다. 긴 변의 양 꼭짓점에 독서실과 무이 씨의 직장이 있고 나머지 두 변의 길이도 짧지만은 않다. 만약 무이 씨가 평소대로 미리 연락을 주었다면 하나는 무이 씨 말마따나 피곤할 텐데 무슨 소리냐며 어서 집으로 가라고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상이 빗나갔어요, 무이 씨.”


하나가 피식 웃으며 백팩 앞주머니를 연다. 볼록한 종이봉투가 보였다. 종이봉투에서 꺼낸 물건의 상태는 당연하게도 아침에 확인했을 때와 똑같다. 두 줄. 하나는 두 줄이 선명한 그것을 손에 든 채 시시티브이 모니터를 본다. 왼쪽 가장자리 화면에 난데없이 한 남자가 나타나더니 냅다 엉덩방아를 찧는다. 둥근 뒤통수를 보이며 털썩 주저앉은 그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 그 자세 그대로 주머니를 뒤적인다. 꺼낸 물건을 팽개치고 또 다른 것을 꺼내 입에 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담배 같았다. 한 대, 두 대. 불현듯 그가 고개를 돌려 오래도록 카메라를 바라본다. 제가 건너다보는 곳에 하나가 있는 줄 알지도 못하면서.


멀리서 사이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의 눈이 휴대전화를 바라본다.






<일상주의보>는 이것으로 완결입니다.

여덟 차례에 걸쳐 하나의 글을 함께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 주에 새로운 소설로 찾아 뵙겠습니다. :)


*<일상주의보>에 쓰인 상단 이미지는 직접 찍은 사진을 쓰거나 Pixabay에 게시된 이미지를 다운로드하여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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