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재의 손놀림이 다급해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범재는 게임 아이콘을 터치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8시. 상일이도 지금쯤 집에서 나왔을 것이다.
게임을 몇 판쯤 했을까, 범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게임을 일시 정지하고 뻐근한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인 범재가 스마트폰 상단을 확인한다. 8시 21분.
“새끼가 첫날부터 빠져가지고.”
범재는 하던 게임을 마저 끝마친 뒤 상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받지 않아 연달아 세 번을 더 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범재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게임을 재실행했다.
어제 만회하지 못한 순위를 갈아치울 심산으로 어렵사리 마련한 아이템을 때려 붓고 한창 게임을 하고 있는데 문득 사이렌이 울렸다. 범재가 무심코 옆을 돌아보니 편의점 통유리 너머로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밤새 내린 눈이 거리에 소복이 쌓여 바깥 풍경이 환했다. 요란하던 사이렌은 금세 멀어지고, 사이렌을 따라 반사적으로 돌아갔던 범재의 고개도 원래대로 수그러들었다. 스마트폰 액정 화면이 다시금 범재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화면 왼쪽에서 토끼가 불쑥 튀어나왔다. Hurry Up! 두더지를 닮은 분홍빛 토끼를 발견한 범재의 손놀림이 다급해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토끼가 털썩 주저앉았다. 또 사이렌이 울렸다. 범재는 짜증이 더덕더덕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이번에는 경찰차였다. 상일이 놈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범재가 다섯 번째 전화를 걸려는 순간,
“개새끼야! 지금이 몇 신데 이제 오냐?”
“야, 그게, 내가 오는데 바로 요 앞에서 사고가 나가지고…….”
“늦게 나와 놓고 개수작 떨지 마라”
“아, 쫌! 믿으라고!”
“무슨 사고가 정확히 어디서 났는지 3초 안에 대답해. 삼, 이, 일.”
“저쪽 부동산 앞 횡단보도. 배달 오토바이가 사람 쳐서 즉사한 듯? 야, 그래, 내가 솔직히 늦잠을 자긴 잤어. 근데 진짜, 존나게 뛰어오는데 진짜, 사고가…….”
목격담 아닌 목격담을 떠벌리는 상일의 말을 중간에 끊고서 범재는 이곳 편의점의 제반 사항과 포스기 조작법을 줄줄이 일러주었다.
잡다한 인수인계를 마친 범재가 한쪽에 벗어두었던 패딩점퍼를 걸치고 편의점을 나선다. 휴일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범재는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슬렁슬렁 걸었다. 부동산 앞 횡단보도는 범재의 자취방과는 반대 방향이었으나 잠깐 들르지도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조금 멀리 횡단보도가 나타났다. 경찰차나 구급차는 보이지 않았다. 상일에게 속았나 싶어 활칵 부아가 치민 범재가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과연 도로변에 사고 흔적들이 어수선히 흩어져 있었다.
핏자국보다도 먼저 범재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내용물이 반쯤 쏟아진 편의점 봉투였다. 으깨진 삼각김밥과 찌그러진 컵라면이 거기 있었다. 보도블록과 횡단보도 사이의 눈밭에 처박힌 길쭉한 물체는 삼다수와 레쓰비였고 몇 발자국 더 떨어진 곳에는 담뱃갑도 있었다.
디스였다.
구겨지기는 했지만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담배였다. 범재는 홀린 듯 그것을 주웠다. 주워서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때마침 횡단보도의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는 것을 본 범재가 즉시 횡단보도를 건넜다. 럭키공인중개사와 고향백반과 김밥천국과 편의점과 옛날왕돈까스와 드림디포와 삼천리자전거와 로또슈퍼와 24시해장국을 거침없이 지나쳤다. 골목이 나왔다. 곧장 꺾어 들어가니 독서실 건물에 딸린 자전거 주차장이 보였다. 따로 지붕이 없는 옥외 주차장이라 길거리보다 눈이 더 많이 쌓여 있었다. 덥석 발을 내디딘 범재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는다.
“아오…….”
범재는 주저앉은 채로 짜증스레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예상대로 라이터와 말보로레드가 잡혔으나 담뱃갑이 텅 비어 있었다.
“씨발, 진짜 좆같네.”
담뱃갑을 구겨 던진 범재가 양손을 패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범재의 눈빛이 까맣게 일렁였다. 다시 바깥으로 나온 손이 쥐고 있는 물건은 새 담배였다.
범재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포장을 벗겼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엉덩이가 시렸다. 왜인지 그것이 몹시 억울했다. 범재가 담배를 또 한 개비 꺼내서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정면에서 바람이 불어와 담배 연기가 뒤쪽으로 흩날렸다. 범재의 시선이 연기를 따라 뒤돌아 상승했다. 건물 현관 구석에 달린 감시 카메라가 보였다. 렌즈가 노출되지 않도록 검은색 돔형 커버를 씌운 카메라였다. 범재가 일하는 편의점에 설치된 것과 똑같은 기종인 듯했다. 범재는 가만히 그것을 응시했다. 내부에 카메라를 품은 둥근 커버가 흰자위 없는 눈동자처럼 번드르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