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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일상주의보 #6

그 씨발은 어디서 온 씨발일까

by 해란

돌연 정적이 흘렀다.

드디어 끝났구나 싶었는데 느닷없이 하나의 귓가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뭐? 씨이발? 개년아,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똥은 하나가 하늘 같고 왕 같은 고객에게 욕을 했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하나의 콜이 윗선으로 올라갔다. 녹음된 음성 파일을 확인해 보니 그 씨발은 분명 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나는 어리둥절했다. 잠자코 듣기만 했는데, 숨소리조차 낸 기억이 없는데 똥이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쨌거나 하나는 팀장의 지시대로 똥에게 사죄했다. 무의미한 사죄였다. 이튿날부터 똥 사내는 물 만난 고기처럼 매일 콜센터로 전화를 걸어 하나를 찾아댔다.


“씨발 너 말고, 하난지 둘인지 씨발년인지 고객을 좆같이 보는 정신 나간 년 바꾸라니까?”


그 씨발은 어디서 온 씨발일까.


하나가 머리맡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찾아 쥔다. 누울 때까지만 해도 잠이 쏟아졌는데 막상 눕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누우며 화면을 터치하자 밝은 조도 탓에 눈이 시렸다.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점 관상. 하나가 습관적으로 오른쪽 눈 밑의 점을 매만진다. 하나는 한때 이 점을 빼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스마트폰을 도로 머리맡에 두고서 하나가 몸을 똑바로 했다. 점점 더 잠이 달아나면서 천천히 어둠에 눈이 익었다. 검기만 하던 사물들이 어렴풋이 제 실루엣을 드러냈다. 책상, 책상 위 노트북, 노트북 옆 가방. 가방의 앞섶이 불룩했다. 하나는 더럭 무이 씨가 보고 싶었다.


이번 주는 무이 씨가 야간 근무를 하는 주간. 밤이 이슥한 지금도 한창 졸음과 씨름하며 작업대 앞에 서 있을 무이 씨를 생각하니 하나는 저 혼자 편히 누워 있는 것이 미안했다. 새 직장을 알아보는 동안 잠시 일할 요량으로 들어간 독서실 총무 자리도 곧 삼 개월 차에 접어드는데 아직도 마땅한 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약한 요의가 하나의 배를 간질였다.






뜬눈으로 새해를 맞은 범재가 마른세수를 한 손으로 눈을 비벼댔다. 상일이 자식은 여태 꿈나라를 헤매고 있겠지,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났지만 그래 봐야 상일도 곧 일어나야 할 처지였다. 어제 면접을 본 사장이 상일이더러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 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상일이가 지내는 고시원은 범재의 자취방보다 멀었다. 부지런히 걸어도 편의점까지 오려면 족히 20분은 걸릴 터였다. 범재는 괜히 신이 나서 획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딸랑, 소리와 함께 편의점 유리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막 들어온 손님이 곧장 음료 코너로 가 허리를 숙였다. 생수를 집으려는 모양이었다. 손님은 몇 가지 상품을 더 골라든 뒤 성큼성큼 카운터로 다가왔다. 투박한 눈썹, 쳐진 눈꼬리. 한눈에도 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손님은 작업복 점퍼가 타이트할 정도로 체격이 건장했다. 범재가 손님이 카운터 위에 부려놓은 물건을 하나씩 집어 든다. 신라면 큰 컵 하나, 삑. 미니컵 하나, 삑.


“나무젓가락 필요하세요?”


끄덕끄덕. 참치마요 하나, 전주비빔 하나. 삑, 삑.


“봉투에 담아 드릴까요?”


끄덕끄덕. 삼다수 한 병, 삑. 손님이 계산대 한쪽에 놓인 온장고에서 원 플러스 원 행사품인 캔 커피를 꺼냈다.


“이, 이, 이거 하고 디, 디스도요.”


“네?”


“디, 디, 디스. 하, 한 갑.”


“아, 디스요.”


범재는 담배 진열대에서 디스 한 갑을 꺼낸 다음 그것과 레쓰비의 바코드를 마저 찍었다.


“9,200원입니다.”


뒷주머니를 만져본 손님이 다시 손을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얄팍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민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속으로 말더듬이와 병신이라는 단어를 함께 떠올리고 있던 범재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영수증 드릴까요?”


손님은 유순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물건이 담긴 비닐봉투를 왼쪽 손목에 걸고 오른손으로 유리문을 밀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이 사라진 유리문 너머로 차선을 무시하고 인도로 진입하는 배달 오토바이가 보였다. 범재가 혀를 끌끌 차며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저런 새끼는 사고가 한 번 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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