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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일상주의보 #5

상담원들은 사내를 똥이라고 불렀다.

by 해란

원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하나는 보일러를 틀고 욕실로 직행했다. 조금 뜨겁다 싶게 수온을 조절하고 거품 낸 타월로 몸을 구석구석 문지르고 있자니 급격하게 허기가 졌다.


오렌지.


하나의 머릿속에서 동그란 오렌지가 빙글빙글 맴돌았다. 엊그제 사다 넣어둔 오렌지가 아직 냉장고에 남아 있을 터였다. 오렌지, 라는 말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고였다. 하나는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물이 듣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며 욕실에서 나왔다.


허둥지둥 속옷과 잠옷을 꿰어 입고 냉큼 오렌지를 꺼내든 하나가 개수대 앞에 선 채로 껍질을 깐다. 까서 먹는다. 상큼한 알갱이들이 입안에서 톡톡 터졌다. 그렇게 오렌지 세 개를 연달아 해치우고 나서야 하나는 당즙이 흘러 끈적끈적해진 손을 흐르는 물에 씻었다.


뒤늦게 스킨과 크림을 바르고 드라이어를 손에 든 하나의 눈빛이 자꾸만 가물거린다. 하나는 창밖과 시계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해는 졌으나 잠자리에 들기는 아직 이른 시간. 게슴츠레한 눈으로 어찌어찌 머리칼을 다 말린 하나가 느릿느릿 이부자리를 펴고 전기 스위치에 손을 뻗는다. 달칵, 어둠이 내렸다.


하나는 똑바로 누워 깍지 낀 두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얹고 눈을 감았다. 깜깜했다. 눈을 떴다. 깜깜했다. 눈을 뜨나 감으나 깜깜한 공간 속에 정적이 차올랐다. 첵, 첵, 첵, 첵…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첵, 첵, 첵, 첵…… 잠기운이 푸슬푸슬 흩어졌다.


정말 잠깐이었다. 고객과 통화를 하던 중에 하나는 정말이지 깜빡 졸았다. 상대는 이미 상담원들 사이에서 악평이 자자한 고객으로 두어 달에 한 번씩 잊을 만하면 전화를 걸어와 무턱대고 노골적인 농담을 하거나 욕을 퍼붓는 사내였다.


상담원들은 사내를 똥이라고 불렀다. 회사의 기본 방침상 상담원이 먼저 고객의 전화를 끊을 수는 없었으므로 똥을 밟은 상담원은 누구나 1초라도 빨리 똥이 먼저 전화를 끊게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상담원과 고객이라는 관계에서 칼자루를 쥔 쪽은 결국 고객인지라 대개는 똥 사내가 제풀에 지쳐 끊기를 기다리는 방법이 최선책이었다. 출처를 확인할 길 없는 똥 치우기 대책들이 풍문처럼 상담원들 사이를 떠돌았다.


하나는 사내가 씨발이라고 말할 때마다 빈 포스트잇에 바를 정(正) 자의 획을 하나씩 그었다. 씨발은 사내가 가장 애용하는 욕이었는데 개년과 좆같은 년이 그 뒤를 이었다. 사내의 폭언에 기계적으로 대꾸하며 바를 정 자를 반복해 쓰고 있으면 씨발이라는 말에 대한 감도가 멀어졌다. 그런다고 해서 부당한 모욕감이 줄어들지는 않았으나 가만히 앉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날 하나가 똥이 내뱉는 씨발 소리를 스물 하고도 여덟 번쯤 들었을 때 획을 긋던 샤프심이 부러졌다. 하나는 화들짝 깨어났다. 통화 중에 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가 정신을 차리려 눈을 부릅뜨고 깜빡이는 사이 여섯 개째 바를 정 자가 완성되었다. 서른한 번째 획을 긋는 하나의 눈빛이 가물가물 흔들렸다. 서른둘, 서른셋, 서른넷…… 푹, 고개가 꺾였다.


씨……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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