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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일상주의보 #4

그런 무이 씨가 하나는 좋았다

by 해란

“근데요, 이거 학년이요, 여기 뭐라고 써요?”


“학년이 왜요?”


“지금은 2학년인데 곧 3학년 올라가서요.”


“아, 올라가는 학년으로 쓰면 돼요.”


담담히 대답했지만 하나는 내심 놀랐다. 덩치도 작고 목도리도 앳돼서 중학생이겠거니 짐작한 탓이다.


‘저 조그만 아이가 내후년이면 성인이 된다니…….’


등록을 마치고 3층으로 올라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나가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본다. 12월 31일. 내일이면 하나도 서른이다. 대한민국은 왜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는가, 만 나이로는 아직 이십 대라고 위안을 삼는 딱 그만큼 예민하게 서른을 감지하는 제 모습이 하나는 못마땅했다. 하나는 문득 오늘 퇴근길에는 꼭 걸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학생들이 하나 둘 독서실 문을 열고 들어와 제자리로 사라졌다. 하나는 어제 읽던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사이사이 몇 번인가 고개를 들어 손님을 맞고, 지폐를 동전으로 교환해주고, 몇 통의 문의 전화를 받았다.


오후 6시. 공무원 시험 준비생인 서른일곱 살 야간 총무가 언제나처럼 교대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하나는 사소한 인수인계를 한 다음 그대로 짐을 챙겨 아침에 통과했던 문들을 역순으로 통과했다. 건물 현관문을 열자 차디찬 바람이 훅 달려들었다. 절로 몸이 떨려와 하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정류장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24시해장국, 로또슈퍼, 삼천리자전거, 드림디포, 옛날왕돈까스, GS25, 김밥천국, 고향백반, 럭키공인중개사.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빨간불이 들어온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선 하나가 외투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나 곧 저녁 먹고 근무 들어가요.


무이 씨.

하나의 오랜 연인.


무이 씨는 말더듬이다. 그래서 무이 씨는 최소한의 말로 최대한의 표현을 할 줄 알았다. 무이 씨가 만들어내는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어서 더듬거리는 말투에 익숙해지면 한 번만 들어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거의 이해할 수 있었다. 말투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때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뭇사람들이 마구 쏟아내는 문장이 지닌 폭력성에 비하면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했다. 지난 8년간 무이 씨와 함께하며 하나는 침묵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웠고, 뒷말을 기다리는 인내심을 길렀다.


무이 씨.

재촉하거나 다그치거나 강요하는 일에 서투른 사람.

견디고 기다리고 스며드는 데 익숙한 사람.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무이 씨. 그런 무이 씨가 하나는 좋았다. 좋고, 아득했다. 무이 씨가 무이 씨여서 좋은 만큼 무이 씨가 과거에 무이 씨였고, 지금도 무이 씨고, 앞으로도 무이 씨일 거라는 사실에 미래가 아득했다.


무이 씨의 메시지를 응시하는 하나의 눈빛이 고요히 일렁인다. 서른 즈음이면 아마 결혼했겠지, 적어도 결혼을 앞둔 무언가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기치 못하게 무이 씨를 만나 마음이 흔들리게 될 줄 몰랐던 시기, 뚜렷한 미래 없이 오래도록 한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때가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하나는 생경했다.


하나는 전화기를 다시 외투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파란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달리다시피 횡단보도를 건너 멍하니 걸음을 옮기던 하나가 불현듯 발을 멈추고 방금 지나쳐온 가게를 돌아본다. 덕지덕지 나붙은 빛바랜 포스터들 탓에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간판에 박힌 소망이라는 글자만큼은 또렷했다. 잔뜩 때가 껴 어스레하게 빛나는 간판을 보며 하나는 눈을 깜박였다. 약국에서 사야 할 물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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