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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일상주의보 #3

“꺼져. 남이야 똥내가 나든 말든.”

by 해란

“여보세…….”


“얼씨구, 자고 있었냐?”


“어어…… 왜…….”


“삼 초면 도착하니까 빨리 문 열어.”


뚝, 전화가 끊겼다. 범재는 휴대전화를 귀 위에 올려둔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서너 시간쯤 잤을까. 아침 8시에 퇴근해서 일부러 오전으로 등록한 토익 수업을 듣고, 잠깐 집에 들렀다가 시사 스터디를 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린 뒤였다. 범재로서는 출근시간 전까지 일 분 일 초라도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야! 형님 오셨다. 문 열어라.”


발로 현관문을 차는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야, 한범재! 빨리 안 여냐? 야! 야, 야, 야!”


“아오, 김상일 저 개새끼…….”


“추워 뒈지겠다고! 빨리 좀 열…… 와, 면상 뭐냐. 완전 부어가지고 코가 한라봉이네.”


“그냥 콱 얼어 뒈져버리지 왜 와서 갈구고 지랄이야.”


“뭐래, 너네 오전 타임 빈다고 오라며. 니 근무 때 같이 가자더니 그새 까먹었냐?”


어깨를 밀며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상일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범재가 문을 닫는다. 오전 근무자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사장은 잔뜩 뿔이 났다. 주변에 당장 일할 만한 사람이 없느냐며 닦달을 해대는데 떠오르는 녀석이 상일이뿐이었다. 기억을 더듬던 범재가 불현듯 눈을 둥그렇게 뜬다.


“헉, 지금 몇 시지?”


“열 시.”


“구라 친다. 아홉 시 삼십 분이구만. 지각한 줄 알고 식겁했네.”


“야, 충전기 어딨냐?”


“눈깔 없냐? 저기 꽂혀 있잖아.”


“이건 또 뭔 테이프를 이렇게 감아 놨어.”


“싫으면 쓰지 말던가.”


“새끼가 쪼잔하기는. 넌 일어났으면 양치질이나 해라. 입에서 썩은내 난다.”


“하아아―.”


“악 똥내! 미친놈아 아가리 치워!”


“진짜 구린가 보군. 닦는다.”


범재가 화장실로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쭉 짠다. 양칫물이 튄 거울을 보며 오른손으로는 양치를, 왼손으로는 뻗친 옆머리를 매만진다. 반쯤 열린 문 틈으로 상일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야, 야. 이리 좀 와 봐.”


“애."


"와서 이거 좀 봐."


"나 이음 양히주잉 거 아 버여?”


“사십 대 추정 남자가 서울역 고가도로 위에서 분신을 시도했대.”


“부시?”


“부시가 아니고 분신, 분신. 지가 지 몸에다 불 지르는 거.”


“주어때?”


“뭐?”


“주, 겄냐거.”


“아, 죽었냐고. 아니 죽지는 않고 위독한 상태라는데?”


“어야 난 떠 주어따는 주.”


“미친, 저번에 그 환풍구 그거 죽은 게 열여섯 명이나 되네?”


“그얼 이에 아랐냐.”


“성분표시 속인 분유 유통업체 여덟 곳 적발.”


“나은 부유 앙 머그니까 상가너써.”


“아 진짜 니가 뭐라고 씨부리는지 아까부터 존나 못 알아듣겠거든?”


“나은 부…… 퉤. 분유 안 먹으니까 상관없다고 씹새야.”


“다 닦았냐?”


“벌써, 이미, 아까, 다 닦았거든?”


“오! 대박 사건!”


“뉴스 그만 봐.”


“아니거든요, 뉴스 이미 안 보거든요, 지금은 페이스북 보거든요.”


“네네, 그러세요. 대단하십니다.”


“됐고 너도 영훈이 페북이나 봐라.”


“왜 뭔데.”


“아 쫌 그냥 보면 안 되냐?”


“봤는데 별 거 아니면 너…… 헐.”


“봤냐? 와, 새끼 진짜 대회 나갔어. 심지어 우승함. 미친놈이 밥 처먹고 게임만 했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보며 범재가 뒤통수를 벅벅 긁는다. 영훈의 초대로 시작한 게임을 하느라 오늘 아침에도 다른 애들한테 게임 초대 메시지를 날렸지, 생각하면서. 불알친구이기는 하지만 영철은 자신이나 상일과는 늘 달랐다. 비슷하고 놀고 비슷하게 공부하는 것 같은데 결과를 놓고 보면 언제나 저만치 앞서 있었다. 여자친구와 함께 찍은 영철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범재는 영철이 다음 학기 장학금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범재의 머릿속에서 두더지처럼 생긴 분홍빛 토끼가 펄쩍펄쩍 뛰었다. Hurry Up, Hurry Up!


“야, 나가자.”


“벌써?”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근데 너 양치만 하고 세수는 안 하냐?”


“아까 자기 전에 샤워했어.”


“씻고 잤는데도 입에서 똥내가 났단 말이야?”


“꺼져. 남이야 똥내가 나든 말든.”






하나가 기거하는 공간은 독서실에서 멀지 않다. 버스로 세 정거장. 정거장 사이가 가까워 걸어도 20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가을에는 날이 선선해서 출퇴근길을 걸으면 싱그러운 바람이 뺨을 쓸었다. 그러다 바람에 찬 기운이 묻어난다 싶더니 덜컥 겨울이 왔다. 하나는 요즈음 부쩍 추위를 많이 탔다. 춥더라도 가끔은 운동 삼아 걸어가야지 했던 지난밤의 결심은 다음날 아침 현관문을 열자마자 무너지기 일쑤였고, 오늘 아침에도 버스 단말기에 카드를 찍고 말았다.


“저기요.”


밖에서 기웃거리던 학생이 독서실 문을 열고 삐죽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에 좀 보고 싶은데요, 신발 벗고 들어가야 돼요?”


“네. 거기 벗어두고 들어오세요.”


두껍고 큼지막한 뿔테 안경을 쓴 남자애. 아이는 키가 작고 코밑이 새파랬다. 하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 열람실과 휴게실과 인터넷 이용실을 차례로 보여준 다음 여기는 여자층이고 3층이 남자층인데 두 층 다 구조는 똑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등록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하나가 카운터 건너편에 얌전히 서 있는 아이에게 신청서를 건넸다.


“근데요, 이거 학년이요, 여기 뭐라고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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