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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일상주의보 #2

by 해란
그렇게 살 거면 후회하지 말고
후회하기 싫으면 그렇게 살지 마


새로운 단서. 청소를 하면서 책상 정경을 토대로 자리 주인이 어떤 인물일지 어림잡아 보는 것은 하나가 즐기는 놀이였다. 책등에 적힌 제목이라든가 정돈 스타일, 개인 비품의 가짓수를 비롯하여 사물함 겸 책장에 자물쇠를 다는지 안 다는지,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면 거기 적힌 내용은 무엇이고 글씨체는 어떤지 눈에 보이는 단서들을 조합해 한 명의 인물을 그려내는 것이다.


가령 지금 청소 중인 8번 자리는 책장에 자물쇠가 걸려 있고 책상 벽면을 따라 좌에서 우로 여러 문제집텀블러, 커피믹스, 구강세정제, 안경닦이, 핸드크림, 페이스미스트, 수분크림, 립밤 따위가 조르르 둘러서 있다. 그밖에도 네모반듯하게 개킨 무릎담요며 발열방석, 전기 발난로, 둥글게 만 멀티탭이 의자 위에 차곡차곡하다. 하나의 시선이 이번에는 책등으로 향한다.


『보건의약관계법규』와 『간호사 국가고시 실전문제 풀이』를 보며 공부하는 이 8번 자리의 주인은 무엇이든 필요할 때 바로 쓸 수 있도록 손이 닿는 곳에 정리하고, 콘센트에 멀티탭을 꽂아 발열방석과 전기 발난로를 연결해야 할 만큼 추위를 타고, 피부가 건조해 수시로 크림을 덧바르는 여자이리라. 그 여자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포스트잇에 ‘그렇게 살지 마’라는 글자를 적었을까.


하나가 무엇을 상상하든 언제나 그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독서실을 찾아왔다. 독서실 카운터에 앉아 목도하는 개성이란 다분히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더구나 그들이 본래 누구건 결제를 마치고 지정된 자리에 입실하면 한시적으로 드러났던 개성조차 안개 속의 연기처럼 묘연해졌다.


일반실 23번, 특실 45번. 마치 제 좌표를 얻음으로써 일개 학생으로 치환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두 비슷하게 말하고 비슷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웬만해선 자리를 벗어나지 않다가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를 하기 위해 엉덩이를 들었다. 통화를 해야 할 때면 휴대전화를 귀에 바싹 붙이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잠깐만, 나 지금 독서실이라” 소곤대며 카운터 앞 복도를 지나쳤다.


스쳐 지나는 옆얼굴들은 혹시 그들끼리 모여 밀약이라도 맺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복도를 지나 마침내 유리문을 빠져나갈 때, 둔중하게 닫히는 문틈으로 새어드는 목소리는 퍽 감각적인 데가 있었다.


획일화된 공간을 벗어나 발성되는 본목소리. 잠깐일 뿐인데도 그것을 들을 때마다 하나는 어쩐지 타인의 알몸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무안했다. 비단 처음 겪는 일도 아니건만…… 이런 일쯤이야 콜센터에서 숱하게 겪지 않았나. 콜이 뜸한 틈을 타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헤드셋을 벗으면 다른 직원들의 목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백여 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꼭 한 덩이로 뭉쳐진 음절 같았다.


그 묵직한 덩어리를 피해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사적인 통화를 나누는 직원들과 종종 마주치곤 했다. 때로는 좌변기에 앉은 채 통화 내용을 듣게 될 때도 있었다. 사무실에서와 다르게 리드미컬한 음절과 팔딱이는 문장이 귀를 파고들었다. 분명 아는 말인데도 태어나 처음 들어본 것처럼 낯설던 감각. 허둥지둥 볼일을 보고 사무실로 돌아가면 출입구 부근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던 직사각 파티션과 책상들.


책상 청소가 끝났으니 이제 바닥을 청소할 차례다. 하나가 진공청소기 스위치를 눌렀다. 3층은 야간 총무가 청소를 해두고 퇴근하기 때문에 하나는 2층만 청소하면 되었다. 그래도 50석을 두 번 돌며 책상과 바닥을 치우고 뒷정리까지 하려면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청소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하나가 청소용 전등을 껐다. 백색소음기와 산소발생기, 환풍기를 가동시키고 자리에 안착하니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계가 59분에서 00분으로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건물 현관 옆 자전거 주차장을 비추는 시시티브이 화면에 항상 첫 번째로 오는 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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