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과 이곳, 거기와 여기
사이렌이 울린다. 범재가 무심코 옆을 돌아본다. 편의점 통유리 너머로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동이 터 희번한 풍경 속에서 앰뷸런스가 사라지자 요란하던 사이렌도 금세 멀어졌다. 사이렌을 따라 반사적으로 돌아갔던 범재의 고개도 원래대로 수그러들었다. 스마트폰 액정 화면이 다시금 범재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화면 왼쪽에서 불쑥 토끼가 튀어나왔다. Hurry Up! 길쭉한 두 귀만 아니라면 두더지와 더 닮아 보이는 분홍빛 토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 중앙에 털썩 주저앉았다. 게임 오버, 참담한 절망의 포즈. 범재가 우악스레 뒤통수를 긁었다. 떨어진 순위를 만회하려고 모든 아이템을 때려 부은 판이었다. 그 아이템들을 사려고 평소 데면데면한 경호며 민수, 옛날 학원 선생님도 모자라 헤어진 수미한테까지 초대 메시지를 날려 포인트를 모았건만…….
“어서 오세요.”
딸랑,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다. 곧장 음료 코너로 가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생수를 집으려는 모양이었다. 손님은 몇 가지 상품을 더 골라든 뒤 성큼성큼 카운터로 다가왔다.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목도리를 친친 감아 눈만 빼꼼한데도 체구에서 성별이 드러났다. 범재는 손님이 카운터 위에 부려놓은 물건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참깨라면 미니컵 하나, 삑.
“나무젓가락 필요하세요?”
절레절레. 참치마요 삼각김밥 한 개, 삑.
“봉투에 담아 드릴까요?”
도리도리. 500밀리 삼다수 한 병, 삑.
“2,600원입니다.”
손님이 등에 맨 빨간 캉골 백팩을 앞으로 돌려 매고서 지퍼를 열었다. 손을 쑥 집어넣어 가방 안을 뒤지다가 불현듯 동작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어쩐지 미안함이 서린 눈동자 아래로 까만 점 하나가 똘박했다. 눈물점. 저게 저렇게 오른쪽 눈가에 있으면 관상이 별로라는 얘기를 범재는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다.
“영수증 드릴까요?”
계산을 마친 상품들을 가방에 넣던 손님이 손을 가로저었다. 외투 속에 옷을 얼마나 껴입었는지 둥실둥실한 두 팔이 가방을 도로 매고는 편의점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통유리 밖이 환했다. 딸랑,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범재는 자연스레 다시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하나가 일터에 들어서려면 총 네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건물 현관문, 2층 독서실 출입문인 유리문, 실내로 들어가는 방음문, 마지막으로 카운터가 있는 사무실 문. 사무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하나는 목도리부터 풀었다.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가방과 외투를 마저 벗고 그대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니 부르르 몸이 떨렸다.
2층 유리문과 방음문 사이 복도에 위치한 카운터는 늘 공기가 싸늘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바람에 실린 냉기가 내부로 흘러드는 탓이다. 더군다나 지금 시간은 8시 2분. 보일러가 꺼진 지 최소 여섯 시간은 지났을 터였다. 하나는 어제 벗어둔 털실내화를 다시 신은 뒤 시시티브이와 독서실 관리를 담당하는 두 대의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지런한 학생이 9시 정각에 맞춰 들이닥치기 전에 청소를 끝내야 했다.
1인 독서실을 표방하는 이곳 독서실의 좌석은 총 100석으로 그중 50석은 2층에, 나머지 50석은 3층에 있다. 두 층 모두 구조는 같다. 휴게실과 인터넷 이용실, 특실, 일반실. 자리마다 여닫이문이 달린 특실은 방 속의 방 같은 형태라 비교적 넓지만 책상마다 미닫이문을 부착해 개인 공간을 확보하는 일반실은 몹시 좁았다.
일반실 입구에 서서 내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는 닭장을 떠올렸다. 전 실에 장착된 백색소음기와 산소발생기, 빵빵하게 터지는 무선 인터넷을 애써 상기해 봐도, 일정한 구획으로 나뉜 공간에 칸칸이 들어찰 학생들을 상상하면 여지없이 꼬꼬댁 머릿속에서 닭이 울었다.
하나도 이곳과 유사한 공간에서 오래 지냈다. 불과 5개월 전까지 하나는 주에 오륙일을 사각 파티션 안에 붙박여 하루 최소 8시간씩 전화를 받았다. 간단없이 걸려오는 고객의 전화를 매뉴얼에 따라 응대하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제공되는 밥을 먹었다. 팀별로 모여 앉은 식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밥알을 씹노라면 꼭 닭장 속에서 모이를 받아먹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곳과 이곳. 거기와 여기. 구성원은 다를지라도 사각 건물 안에 이런 식의 공간을 설비한 장소란 결국 어디나 세련되게 포장한 양계장이 아닌가 하나는 생각했다.
뚜껑을 뗀 작은 쓰레기통과 걸레를 챙겨든 하나가 좌석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다 먹은 음료수 병이나 캔, 사탕 껍질, 휴지 뭉치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종잇조각이나 이면지는 찢어졌든 구겨졌든 건드리지 않았다. 지우개 똥을 걸레로 훔치며 하나가 곁눈질로 책상을 훑는다. 한 책상에 어제까지 없던 포스트잇 두 장이 나붙어 있었다.
그렇게 살 거면 후회하지 말고
후회하기 싫으면 그렇게 살지 마